[문화의 향기] 공장 옆에 화실이 있다
‘공장 옆에 화실’이란 말이 있습니다. ‘경제가 잘 돌아야 그림도 팔린다’는 뜻이죠. 한때 모 미술잡지에서 화가들의 세계 순위를 매긴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빌보드 차트처럼 순위 변동을 포함해 매월 발표했습니다. 50등 정도까지였지 싶은데 대부분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 화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백남준’도 상당히 높은 순위에 있었지만 아쉽게도 국적이 미국이었죠. 그 차트에는 그림 거래 가격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림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돈’이라는 윤활유 덕에 유지·발전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보답도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피카소의 ‘게르니카’, 뭉크의 ‘절규’ 같은 유명 작품이 있는 미술관으로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일들 말입니다. 덩달아 관광, 출판 등 연관 산업도 혜택을 보게 되죠. 그 그림들 자체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귀중한 나라의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경제 수준이 예술의 수준이고, 예술 수준이 곧 그 나라의 수준인 셈이죠.

한국은 어떨까요? 얼마 전 100억원대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상상해봅니다. 한국 경제 규모에 맞게 그런 고가의 그림이 더 많이 나와서 수많은 미술학도와 화가가 다음은 내 차례일 것이라는 뜨거운 기대를 품게 하는 거야 말할 것도 없죠. 그런 명작들이 곳곳의 미술관에 걸려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외국 사례처럼 미술관 앞에 긴 줄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그런 풍경을 말입니다.

한국 야구 발전은 박찬호 덕, 골프는 박세리 덕이라고 저는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연봉과 상금 등으로 성공의 ‘롤모델’을 제시했으니까요. 그 후 수많은 꿈나무가 부모의 응원 속에 야구, 골프를 시작했다는 건 잘 아는 사실이죠. 이 시간에도 스포츠 신동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길을 나설 겁니다. 그 덕에 한국 야구와 골프는 세계를 주름잡고 있지 않습니까? 광고 효과도 좋아서 기업들은 앞다퉈 후원하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그러나 그림 쪽은 그렇지 못한데, 대부분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가 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부모 입장에선 고흐, 이중섭처럼 불행히 살다간 반면교사만 있지 팍팍 밀어줄 이유가 될 롤모델이 없거든요. 20대 때 성공할 수 있는 스포츠 선수와 달리 화가는 너무도 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으니 어쩝니까? 호기롭게 그림값 100억원 이야기도 했지만 그건 화가가 작고한 뒤의 일이고,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그림으로 이름을 알릴 정도면 50~60대는 돼야 하는 숙명이 기다리고 있는 게 사실이죠.

그렇지만 매력적인 ‘히든카드’가 하나 있습니다. 스포츠 스타들이 은퇴하거나 잊혀질 즈음에 비로소 서서히 빛나기 시작한다는 점 그리고 그 빛은 오랫동안, 임종 전까지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이어진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희망을 안고 빛날 그날을 향해 꿋꿋이 걸어갈 충분한 이유가 되지 싶습니다. 자신의 길이 내일의 화가들에게 롤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사명감까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좋아하는 사자성어 중에 ‘군자고궁(君子固窮)’이란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어렵고 궁핍할 때 더 굳고 심지가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엄동설한을 잘 견뎌 훗날 100억원대에 버금가는 명작을 남기는 빛나는 롤모델이 한번 돼보길 모든 화가에게 바라고 응원합니다. 아울러 화실 옆 공장도 잘 돌아가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