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중국이 얕볼 수 없는 것들
올 한 해 국제정세 격랑 속에서 대한민국이 어떤 처지인지 새삼 절감했다. 미국의 압력, 중국의 무시, 일본의 외면, 러시아의 건드려 보기…. 세계 1~4위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지정학적 운명이 자연스레 열강 각축장이었던 구한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는 없던 북한의 갖은 모욕과 위협은 날로 강도를 더해간다. ‘국민 노릇’ 하기도 어려운 시대다.

국익 관점에서 되짚어보면 경제만큼이나 미덥지 못한 게 문재인 정부의 외교다. 크고작은 의전 실수를 재삼 탓하자는 게 아니다. 얽히고설킨 국제정세를 크고 넓게 보고 적절히 대처하고 있느냐다. 외려 국익보다 정권의 안녕이 먼저인 게 아닌지 의구심마저 든다.

주초 한·중·일 정상회의는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케 한다. 중국 관영언론들이 어떤 경위로 “문 대통령이 홍콩과 신장위구르 문제를 중국 내정(內政)으로 본다”고 보도한 것인지, 국제사회가 비판하는데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잘 들었다”고 넘길 일인지, 잘못된 보도라면 청와대는 왜 적극 항의하지 않는지…. 2년 전 ‘혼밥 외교’와 겹쳐져 영 개운치 않다. 정상회담마다 상대국과 발표 뉘앙스가 다른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더 그렇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일 정상을 베이징으로 부르고, 비행기로 3시간 반 떨어진 청두(成都)에서 2인자(리커창 총리)와 나란히 사진 찍게 했다. 14억 중국인들에게 ‘황제 알현’으로 비칠 만한 장면이다. 3년째 이어진 ‘사드 보복’에 대해서도 중국은 ‘하는 거 봐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진핑의 방한 때까지 어떤 청구서를 들이밀지 알 수 없다. 이런데도 인민일보가 한·중 정상 사진을 중·일 정상 사진 위에 배치했다고 반색할 일인가.

외교는 맥락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중국이 한국을 대하는 방식은 140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청나라 초대 주일공사인 하여장(何如璋)은 거문도 사건(1885)에 앞서 영국 공사가 조선에 관해 묻자 “조선인은 어린애 같아서 달래면서 슬쩍 겁주면 쉽게 따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마늘 파동, 사드 보복도 그 연장선이나 다름없다.

중국 지도부의 한국관(觀)은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는 일개 외교부 부국장의 발언에 함축돼 있다. 롤모델이 필요했던 개혁·개방기에는 ‘한국 따라하기’에 바빴지만 이제는 ‘그저그런 나라’로 치부한다. 중국의 오만과 한국의 친중 저자세가 빚어낸 결과다.

예나 지금이나 한·중 관계 본질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래도 중국이 마냥 얕보지 못하는 것은 한·미 동맹과 국가대표 기업들의 존재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실세인 진리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총재가 4년 전 방한했을 때 “한국에서 배울 것은 삼성전자뿐”이라고 속내를 비친 적이 있다. 한국을 평가절하하면서도 삼성전자만큼은 ‘넘사벽’으로 여긴 것이다. 또한 최강대국의 동맹이란 것만큼 든든한 뒷배도 없다.

그런 강점과 비교우위가 위태롭다. 지금 한·미 동맹이 아무 문제가 없고, 삼성전자가 의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이 ‘셰일혁명’ 이후 고립주의로 전환하면서 세계는 ‘완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의심한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른다. 과거사로 얽히고 꼬인 일본은 한국에 대한 ‘전략적 관용’을 접었다. 중국과 일본의 상호 견제관계를 지렛대로 삼았던 ‘스마트 외교’도 실종됐다.

간절히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하듯, 국제정치는 역설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오만한 중국과의 관계도 반대편의 미국 일본과 돈독할 때 더 힘이 생긴다. 국제관계에서 성의를 다하면 상대가 바뀔 것이란 기대만큼 유치한 발상은 없다. 120여 년 전 조선은 무능과 방향착오 친러정책으로 망국을 재촉했다. 세계의 큰 판이 변하는데 한국의 외교는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경구가 더없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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