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뒷문에 늑대, 앞문엔 호랑이
하루하루 뉴스를 좇다 보면 ‘몰입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넓은 시야로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못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해 보이던 일이 나중에 정반대 역설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안 보이고, 못 본다고 있는 게 없어지진 않는다.

세상의 변화는 시계와 닮았다. 초침처럼 바삐 쏟아지는 사건들, 분침 같은 완만한 트렌드, 그리고 시침처럼 얼핏 보면 멈춘 것 같은데 분명히 움직이는 패러다임에 의해 변해간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 것은 한 기업인이 던진 돌발 질문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극복해야 할 최대 과제는 무엇입니까?”

선뜻 하나를 꼽기 어려웠다. 경제활력 저하인가, 저출산·고령화인가, 격차와 양극화인가. 미·중 무역전쟁인가, 안보 위협인가, 일본 수출 규제인가. 모두 다이거나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업인이 자문자답한 화두는 의외였다. “최대 과제가 무엇인지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 게 최대 과제”라는 것이다. 극단적 분열과 갈등 속에 어떤 합의도 불가능해 문제도, 해법도 찾을 수 없는 나라가 돼 간다는 얘기로 들렸다.

이것이 ‘21세기 한국병(病)’일 듯하다. 나라 전체가 뭔가 단단히 꼬이고 막히고 굽어 있음은 명백하다. 누구나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미래를 깊이 고민해 본 지식인들은 어떻게 답할까. 미래학자 홍성국(전 미래에셋대우 사장)은 《수축사회》에서 “팽창시대가 끝나고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문제가 속출하는 ‘수축사회’로 가는 기초 환경의 대전환기인데 땜질 대처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 위기는 경기순환적 성격이 강했지만 수축사회 위기는 사회 전체의 총체적 위기라는 것이다.

후한시대 고사성어인 ‘앞문에 호랑이, 뒷문에 늑대(前虎後狼)’와 같은 상황이다. 일본이 그랬듯이 ‘과거(늑대)’를 정리하기도 벅찬데, 알 수 없는 ‘미래(호랑이)’에 대처해야 하는 딜레마다. 시대에 뒤처진 제도·관행·의식이 급변하는 현실과 부딪히며 곳곳에서 파열음을 낸다. ‘데이터 3법’은 막으면서 ‘타다 금지법’을 밀어붙이는 식이다. 규제사슬에 갇힌 기업들은 ‘탈(脫)한국’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스페인제국이 1492년 아메리카대륙 발견과 국토 통일을 성취하고도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재를 쫓아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듯이, 사람·기술·자본이 떠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철학자 최진석(서강대 명예교수)은 이 혼란과 답답함이 나라 전체의 ‘시선의 높이’가 낮은 데 있다고 지적했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사회와 국가의 높이다. 민주화 다음 선진화는 철학적 시선으로만 넘을 수 있는 투명한 벽인데, 그 앞에 선 우리는 그 벽을 포착도 못하고 있다.”(《탁월한 사유의 시선》)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생각하는 국가의 최대 과제는 무엇인가. 남북관계인가, 적폐청산인가. 공수처인가, 선거제 개편인가. 공정경제인가, 노동 존중인가, 아니면 안 되면 될 때까지 소득주도 성장인가…. 그 어떤 것도 국민들이 느끼는 실존적 근심과 거리가 멀다. 집권세력의 정파적 이익이 국가 미래나 국익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문제가 뭔지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위태로운 경제·외교·안보 현실을 국민이 다 아는데도, 한사코 부인하고 남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싶다.

1인당 소득 3만달러, 경제규모 12위라고 선진국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통령부터 각 분야 리더와 구성원 개개인까지 선진국민 수준의 생각과 시선의 높이를 가질 때라야 겨우 따라갈 수 있다. 출발이 한참 늦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독서목록은 편향된 데다 ‘미래’가 빠져 있다. 좌파든 우파든 한국 정치판의 시선은 다음 선거에 갇혀 있다.

아무도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는 “몸 자체가 과거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말하는 미래는 다 입에 발린 말이고 허구”라고 비판했다. 극복해야 할 최대 과제는 무엇인지 모두가 성찰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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