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첫 재판이 3년 만에 열렸다. 이날 재판은 일본 정부 측이 출석하지 않은 채 원고들의 변론 위주로 진행됐다.

1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부장판사 유석동)는 2016년 12월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등 20여 명이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일본에 반인륜적 불법행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며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1차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재판에 출석한 이용수 할머니(92)는 재판 도중 휠체어에서 내려와 재판부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며 “저희는 아무 죄가 없다”며 “일본이 당당하다면 재판에 나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할머니가 울먹거리며 발언을 이어가자 법정 방청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앞서 원고측은 “1인당 2억원을 배상하라”고 주장하면서도 “소송이라는 형식 때문에 금액을 청구했지만 피해자 분들이 당한 고통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그간 ‘주권면제’ 원칙에 따라 한국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주권면제’란 외국 정부가 특정 국가의 국가법 적용을 면제받을 권리를 말한다. 또한 한·일 양국이 가입한 헤이그협약을 근거로 소송 서류를 접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판에 응하지 않았다. 헤이그협약은 자국의 주권이나 안보를 침해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소장 송달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다. 우리 법원은 일본 정부가 계속해서 소장을 거부하자 올해 3월 공시송달 절차를 진행, 5월 9일 자정부터 송달된 것으로 간주해 변론기일을 잡게 됐다. 공시송달이 된 경우에는 피고가 출석하지 않더라도 민사소송법상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보는 ‘자백 간주’가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재판부는 앞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주장을 법리적으로 검토해 결론을 내릴 전망이다.

재판에 앞서 국제앰내스티 한국지부는 12일 “한국 법원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주권면제, 청구권협정 등의 절차적 이유로 제한될 수 없다”는 취지의 법률의견서를 중앙지법에 제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송달거부와 주권면제 주장은 피해자들의 인권을 재차 침해하고 있다”며 “한국 사법부가 피해자들의 존엄과 회복을 위해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 측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은 2016년 1월 12명의 피해자가 1인당 1억원의 배상을 요구한 소송이 처음이었다. 이 재판 역시 일본 정부의 소장 거부로 4년 가까이 한 차례 기일도 잡지 못했다.

한편 이날 재판부는 “송달 가능한 방법을 강구했지만 더 이상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공시송달을 통해 진행한다”며 “지금이라도 일본이 소송절차에 참여해 적법성 등을 주장한다면 고려해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길원옥·이용수·이옥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모두 휠체어에 앉은 채 재판에 참여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재판부 앞에 나가 울먹이며 “곱게 자라다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46년에 돌아왔다”며 “(나이) 90이 넘도록 아픈 몸을 이끌고 30년 넘게 진상규명, 공식사과를 이렇게 외치고 있는데 일본측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철 모르는 어린 것들을 끌고 갔다”며 “(일본은)할머니들이 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원고 측 대리인단은 “금전적 배상보다도 75년 전 침해당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회복이 중요하다”며 “이 재판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헌법이 보호하는 인간임을 천명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 ‘주권면제’라는 장벽이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라며 “대리인단은 이와 관련해 설득력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판 직후 이용수 할머니는 취재진들과 만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며 “어머니,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대신 붙은 ‘위안부’라는 딱지를 떼고 싶다”고 말했다. 해당 재판의 다음 기일은 내년 2월 5일에 열릴 예정이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