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머리 희롱'으로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전국으로 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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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생 시비 항의가 일제 타도 시위로 전환돼 학생들 총궐기
1천600명 검거·170여명 구속,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힐 만큼 대규모 시위로 번진 광주 학생독립운동은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의 작은 다툼에서 시작됐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통학 열차에서 광주중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등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학생 3명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이들의 희롱은 나주역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는데,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막아서며 다툼이 시작됐다.
그동안 일본 학생들의 행패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다른 한국 학생들이 싸움에 가세하면서 한국 학생 30명, 일본 학생 50명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싸움을 계기로 다음 날 아침 일본인 학생들은 통학열차에 타고 있던 박준채에게 다시 시비를 걸었다.
옆 칸에 타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일고)와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일본인 학생과 대치했지만,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오후 광주에서 송정리로 가던 통학열차 안에서 끝내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중 일본인 학생들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한국 학생들에게 두들겨 맞은 일본 학생들은 다음날인 11일 오후 복수를 하겠다며 죽창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광주역에 몰려왔다.
이를 본 한국 학생 20여명이 곧 출발하려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일본 경찰과 두 학교 선생들이 달려와 해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3일 일왕 생일 '명치절' 축하행사가 열렸다.
행사에 강제동원된 한국 학생들은 침묵으로 저항했다.
행사를 마친 일본인 학생들은 다시 죽검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해 광주역으로 몰려왔고, 행사에 동원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 학생들은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농고 학생들이 학교 창고에서 농기구 등을 들고 광주역으로 달려와 일본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일본 학생 200여명과 한국 학생 200여명이 집단으로 패싸움을 벌이며 광주역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싸움은 기마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과 양쪽 학교 교사들이 막아서면서 일단락됐다.
그사이 긴급회의를 연 장재성·장석천·나승규·국채진 등 학생들은 투쟁 방향을 일본 제국주의 타도로 전환하자고 결의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 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학교 강당에 모여 '일제 타도'를 위한 시위를 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시가지로 나섰다.
이들은 시가지를 누비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를 본 시민들과 다른 한국인 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순식간에 대규모로 늘어났다.
당시 신문은 시위 행렬에 참여한 사람이 3만여명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이후 학교는 휴교하고 일본 경찰은 주동자 색출과 검거를 시작했지만, 학생들은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인 11월 12일 거사를 준비한 이들은 수업 종이 울리자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학생 500여명은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등 미리 준비한 격문을 뿌리거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했고, 시민들 역시 또다시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했다.
1차 시위에서 붙잡혀간 한국 학생들을 구하자며 광주형무소로 향하던 시위대는 결국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이때 60명이 체포되는 등 이 시위로 모두 200여명이 구속됐다.
이러한 사실이 다른 지역에 알려지며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서울과 평양 등 한반도에 있는 전국 300여개 이상 학교가 시위나 동맹휴학 등으로 항거했다.
참가 학생 수는 5만4천여명으로 당시 전체 한국 학생의 절반이 참여했다.
학생독립운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사람만 1천600명으로, 이 가운데 170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582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했고, 2천330명이 무기정학, 298명이 강제 전학 조처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힐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항일 운동이었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며 "역사 알리기와 기념사업을 활성화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1천600명 검거·170여명 구속,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힐 만큼 대규모 시위로 번진 광주 학생독립운동은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의 작은 다툼에서 시작됐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통학 열차에서 광주중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등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학생 3명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이들의 희롱은 나주역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는데,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막아서며 다툼이 시작됐다.
그동안 일본 학생들의 행패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다른 한국 학생들이 싸움에 가세하면서 한국 학생 30명, 일본 학생 50명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싸움을 계기로 다음 날 아침 일본인 학생들은 통학열차에 타고 있던 박준채에게 다시 시비를 걸었다.
옆 칸에 타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일고)와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일본인 학생과 대치했지만,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오후 광주에서 송정리로 가던 통학열차 안에서 끝내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중 일본인 학생들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한국 학생들에게 두들겨 맞은 일본 학생들은 다음날인 11일 오후 복수를 하겠다며 죽창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광주역에 몰려왔다.
이를 본 한국 학생 20여명이 곧 출발하려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일본 경찰과 두 학교 선생들이 달려와 해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3일 일왕 생일 '명치절' 축하행사가 열렸다.
행사에 강제동원된 한국 학생들은 침묵으로 저항했다.
행사를 마친 일본인 학생들은 다시 죽검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해 광주역으로 몰려왔고, 행사에 동원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 학생들은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농고 학생들이 학교 창고에서 농기구 등을 들고 광주역으로 달려와 일본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일본 학생 200여명과 한국 학생 200여명이 집단으로 패싸움을 벌이며 광주역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싸움은 기마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과 양쪽 학교 교사들이 막아서면서 일단락됐다.
그사이 긴급회의를 연 장재성·장석천·나승규·국채진 등 학생들은 투쟁 방향을 일본 제국주의 타도로 전환하자고 결의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 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학교 강당에 모여 '일제 타도'를 위한 시위를 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시가지로 나섰다.
이들은 시가지를 누비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를 본 시민들과 다른 한국인 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순식간에 대규모로 늘어났다.
당시 신문은 시위 행렬에 참여한 사람이 3만여명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이후 학교는 휴교하고 일본 경찰은 주동자 색출과 검거를 시작했지만, 학생들은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인 11월 12일 거사를 준비한 이들은 수업 종이 울리자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학생 500여명은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등 미리 준비한 격문을 뿌리거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했고, 시민들 역시 또다시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했다.
1차 시위에서 붙잡혀간 한국 학생들을 구하자며 광주형무소로 향하던 시위대는 결국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이때 60명이 체포되는 등 이 시위로 모두 200여명이 구속됐다.
이러한 사실이 다른 지역에 알려지며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서울과 평양 등 한반도에 있는 전국 300여개 이상 학교가 시위나 동맹휴학 등으로 항거했다.
참가 학생 수는 5만4천여명으로 당시 전체 한국 학생의 절반이 참여했다.
학생독립운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사람만 1천600명으로, 이 가운데 170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582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했고, 2천330명이 무기정학, 298명이 강제 전학 조처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힐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항일 운동이었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며 "역사 알리기와 기념사업을 활성화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