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와의 설레는 만남
얼마 전 만난 친구 J의 인상적인 일정표를 떠올려 본다. 요즘 누구나 그렇지만 약속 한 번 잡기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한 달은 물론이고 두 달, 석 달치 약속이 모두 잡혀 있기도 하다. J와 나 역시도 어렵게 날짜를 맞춰 만났기에 아직도 그렇게 바쁘냐고 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일정표를 보여줬다. 역시나 꽉 찬 일정 속에서 특이한 게 눈에 띄었다. 매주 특정 요일에 어김없이 ‘M’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나와의 만남’이라고 했다.

매주 하루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비워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골라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빈둥대거나, 산책을 한다고 했다. 무엇을 하든 일과 조금도 관계가 없는 것으로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충분히 공감이 갔다.

몇 년 전 미국 방문 중 평소 알고 지내던 미국인 학자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식사 후 그는 나에게 보여 줄 곳이 있다며 자기 집 지하의 16㎡ 남짓한 방으로 데리고 갔다. 1주일에 10시간 정도를 그곳에서 혼자 보낸다고 했다. 직업적인 일 외에 온갖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전공서적, 전문잡지 등 그의 직업과 관련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시간만큼은 이메일, 휴대폰 등을 사용하지 않고 외부와 단절한다. 그는 그곳을 ‘마음충전소(mind-charging station)’라고 불렀다.

친구 J에게 ‘나와의 만남’이 있고 미국인 학자에게 ‘마음충전소’가 있다면 나에게는 ‘생각의자’가 있다. 생각의자는 내가 다니는 산책길 호젓한 곳에 찍어둔 벤치다. 이름은 생각의자라고 붙였지만 거기에 앉아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 시선을 두고 멍하니 생각을 날려 보낸다. 때로는 분주한 새들의 대화에 귓전을 가만히 내주고 있기도 한다. 생각의자에 앉아 생각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면 정리하지 못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머리가 상쾌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뭔가를 자꾸 채워 넣으려고만 한다. 그러면 우리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익숙하고 유익한 지식, 경험, 감정 등은 조금씩 소진된다. 채울 수 있는 공간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비워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 나와의 만남, 마음충전소 그리고 생각의자를 각자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