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소득주도·혁신에 갇힌 '성장'을 놓아줘라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는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세 축이다. 이 중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성장을 중시하는 정부’라고 평가할 만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장 앞에 놓인 수식어들 때문이다. ‘소득주도’는 직장이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 증가를, ‘혁신’은 벤처기업들의 성장을 뜻한다. 이 단어들이 성장을 제한된 틀 안에 가둬버렸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 선순환을 일으켜 견실한 경제 성장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2년 반가량 지난 지금은 이런 주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성과가 나빴기 때문이다. 통계청은 2017년 9월 경기 고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돌아섰다고 발표했다. 집권 4개월 만에 경기가 꺾인 것이다. 이후 경기 하락 속도는 가팔랐다. 앞으로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모른다.

이런 분위기 탓에 정부와 여당이 하는 말과 태도가 최근 확 달라졌다. 경제 해법보다 ‘희망사항’을 말하는 사례가 늘었다. 단골 소재는 ‘북한’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20일 “현재로 봐서는 2% 성장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많은 분이 남북한 경제 관계가 잘 풀어지면 경제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전문가와 연구기관, 국제기구의 의견을 외면하는 일도 많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0.3%포인트 떨어뜨린 2.1%로 최근 수정 발표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러면서 일본 성장률은 종전 0.7%에서 1.0%로 끌어올렸다. ‘극일(克日)’을 외치고 있는 정부와 여당이 이번에는 조용했다. 소득주도성장이나 혁신성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재정 투입을 통한 경기 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내년 예산안은 올해보다 43조9000억원(9.3%) 늘었다. 이를 위해 내년 60조2000여억원의 적자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당 내에서는 “당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확장적 예산은 아니다”는 말이 나왔다. ‘재정 중독증’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야당의 성장 담론에는 노골적으로 ‘적폐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최근 발표한 ‘민부론(民富論: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지향)’에 대해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실패한 경제정책에 대한 향수만 가득하다”고 비판했다. 정책 대결이 아니라 재판 중인 두 전직 대통령의 나쁜 이미지를 활용한 정치 공세다.

성장은 부자만을 위한 것도, 가난한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국민 전체가 자연스럽게 풍요로 가는 과정이다. 얼마 전 공개된 한국고용연구원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9~34세 청년 1200명 가운데 42%가 ‘분배보다 성장의 가치가 더 중요시되는 사회를 원한다’고 답했다. ‘분배가 더 중요시되는 사회’를 택한 응답(27%)보다 훨씬 많았다. 개인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은 분배가 아니라 성장이다.

소득주도성장이나 혁신성장은 부자보다는 중산층과 서민,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성장의 혜택을 더 누리도록 하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성장을 분배의 틀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이후 우리 사회의 분배는 더 나빠졌고 청년 실업률도 치솟았다. 자기들 뜻대로 성장을 설계할 수 있다는 오만이 빚은 참사다.

앞으로 성장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혁신과 모방, 원천기술과 생산기술, 제조업과 서비스업 중 어느 것이 더 큰 역할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이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신산업뿐만 아니라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섬유 기계 등 전통산업도 미래를 이끌 훌륭한 후보들이다. 골방이나 창고 같은 곳에서 미래 먹거리가 나올 수도 있다. 모든 이가 자유롭게 마음껏 뛸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뛰는 선수들이 많아야 우리 사회를 먹여 살릴 ‘효자’도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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