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원칙, 소통 그리고 용기
직장생활을 길게 하다 보면 업무처리와 행동거지에서 나름대로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내게도 적지 않은 위기가 있었지만 32년 공직생활을 몇 년 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당시 동료와 후배들에게서 받은 질문 중 하나가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공직생활 초년 시절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했던 것 같다. 담당 업무가 아니어도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일이라면 먼저 나서곤 했다. 공직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내가 직접 일을 처리하기보다 주로 상관을 보좌하는 일이 많았다. 내 수준이 아니라 국가수반 등 최상위층에서 이뤄지는 일을 주로 보좌했기 때문에 성과를 내는 요인도 달랐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기후변화 대응, 지역균형발전 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처리하고 보좌할 때 중요한 덕목은 원칙과 소통 그리고 용기였다.

먼저 원칙을 세우고 지켜야 한다. 공직사회에서 상급자의 지시를 이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상관 자신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불법적이고 부당한 지시를 하기도 한다. 법령에 근거가 있을 땐 근거를 제시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근거가 없는 경우다. 이럴 땐 효율성, 공정성, 투명성 등 일 처리의 일반 원칙을 정하고 상급자가 그에 따르도록 문서를 작성하는 게 문제 발생을 최소화하면서 상급자의 지시 취지는 살릴 길이다.

다른 중요 요인은 소통과 용기다. 원칙을 지키려면 상급자와의 소통이 불가피한데, 고집 강하고 독선적인 성격의 상관이 문제였다. 장관급 공무원들조차 때론 고함을 치는 등 분노를 표출하는 일이 있어 쌍방향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곤 했다. 이때 주눅 들지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소통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면 보고가 부담스럽다면 서면 보고나 문자메시지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 보고할 때는 모든 정보와 문제점을 가감 없이 노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왜곡된 의사결정을 방지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자신의 보고가 상급자를 위한 것임을 상급자가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상관을 위한다는 자세로 정보와 문제점을 제시하면 문제는 해결됐다. 원칙, 소통, 용기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기였던 것 같다. 용기가 없다면 원칙을 세울 필요도 없으며 소통은 아예 가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일본의 수출규제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용기와 소통이다. 이를 바탕으로 많은 난제가 원활히 처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