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기획재정부, 경제위기 대응 의지 있나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지난주 전체회의를 열고 추가경정예산안 논의를 시작했다. 추경안 이름은 ‘미세먼지·민생 추경’이다. 장마철에 미세먼지 추경이라니 엉뚱하다. ‘싸움판 국회’에서 늦어진 것이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다음이다.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로 어려움이 예상되는 국내 산업계를 돕기 위해 3000억원을 추가 편성해달라는 더불어민주당 요구에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각 부처로부터 1차로 요청받은 액수는 1200여억원”이라며 “금액이 더 커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은 지난 4월 말이다. 그 뒤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 등 핵폭탄급 악재들이 터졌다. 수출은 지난 상반기 8.5% 감소(전년 동기 대비)했다. 이 가운데 중국으로의 수출이 16.9%나 줄었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7월 340억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면서 그 불똥이 한국으로 튀었다. 여기에다 미국은 추가로 2000억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올 6월부터 25% 관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하반기 수출이 정말로 위태로워졌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한국 핵심산업에 대한 일본의 공세도 시작됐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등 과거사까지 얽혔다.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까지 취하면 양국은 전면전으로 갈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인데도 기재부는 정치권에서 요구한 위기대응 예산 3000억원조차 채워넣지 못했다는 얘기다. 국회가 지난달 28일 정상화됐기 때문에 추경 논의 시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충분한 물량으로 선제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컨대 10조원 넘는 수정안을 역제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지역구 민원성 ‘쪽지 예산’들이 대신 치고들어갈 판이다.

올해 정기국회에서 다룰 예산안도 마찬가지다. 소득 재분배와 경기 대응에 초점을 맞춘 일상적인 예산편성지침을 위기대응용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확인해보니 그런 일은 아직 없다. 3월 확정한 예산편성지침에 따라 5월 말까지 각 부처로부터 예산 초안을 받았고, ‘칼질’하는 작업을 열심히 진행 중이라고 한다.

지금 몰아치고 있는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신용카드 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다르다. 수출 관련 제조업 쪽에 악재가 집중되고 있다. 세계 주요국의 무역 불균형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 생산능력 10개월 연속 하락, 제조업 일자리 15개월 연속 감소, 국내 제조업의 해외 이탈 급증, 공장 가동률 급락 등 나쁜 소식투성이다.

재정 여건마저 취약해지고 있다. 국세 수입은 올 1월부터 5월까지 1조2000여억원 줄었다. 실탄이 부족해진 만큼 재정 운용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노인 단기일자리나 청년 아르바이트 쪼개기 같은 선심성 일자리 만들기는 평상시에 쓰는 복지정책이다. 지금은 중소 수출 제조업체들의 일자리 지키기, 조선 자동차 등 어려움에 빠진 산업의 협력업체 구하기가 더 시급하다. 제조업이 무너지면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해 한국 사회의 분배가 급속히 무너진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돈을 마음대로 찍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한국은 다르다. 세제와 예산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재정정책을 운용하는 기재부가 그래서 컨트롤타워다.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최후 보루다. 입만 살아 있는 곳들과는 달라야 한다. 담당 공무원들은 상상력, 도전정신과 함께 막중한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국회가 추경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세종시로 이사가면서 현장감각이 떨어진 것일 수 있고, 청와대 하명을 받는 일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적폐 청산’의 서슬에 짓눌려 생각을 멈춘 것일 가능성도 있고, 외교나 통상 현안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로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돼 있는 모습을 기재부 공무원들에게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정말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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