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이 늘어나 소비수요가 개성화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서구 산업사회의 큰 화두 중 하나는 생산유연성 문제였다. 이전에는 내구소비재 신규 수요 덕택에 어떤 제품이라도 생산하면 팔렸다. 그러나 내구소비재 시장이 포화하면서 소비자의 다양한 개성을 맞추지 못하면 물건을 팔기 어려워졌다.
그렇다 보니 많은 학자는 제품 다양성을 초래하는 범위의 경제와 유연한 노동조직에 관심을 두고 활발한 연구를 했다. 이 중 한 보고서가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요지는 유연성 발휘는 기둥이나 뼈대와 같은 강한 ‘경직성’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를 끈 것은 일본 기업의 종신고용제에 대한 관점이었다. 종신고용은 유연성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기둥이나 뼈대라는 것이다. 종신고용이라는 기둥이 있기 때문에 근로자의 전환 배치, 작업시간 조정, 장기 교육 파견 등 조직 내 다양한 작은 수단들을 통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당시 미국식 대량 생산 방식은 해고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노동유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런 의미의 노동유연성도 변하지 않는 기둥이 있어 가능했다. 뼈대는 ‘직무기술서’였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각 노동자가 작업할 내용과 방법이 적혀 있어 노동자들은 이에 따라 작업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직무기술서는 기업의 생산 차질을 발생시키지 않고 해고와 채용을 쉽게 하도록 한다는 기둥이었다.
최근 산업사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소비자 맞춤형 생산시대가 열리면서 기업들은 과거보다 더 높은 생산유연성을 필요로 하게 됐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유연성 제고 수단들이 모두 경직화돼 있어 걱정이다. 작업시간 조정과 전환 배치, 생산라인 조정 등 조직 내 다양한 작은 유연성 발휘 수단도 경직화됐다. 해고와 신규 채용이라는 유연성 발휘 수단들도 갈수록 경직화되고 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생산유연성을 어떻게 확보해갈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