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팔순 청춘' 작가들의 '젊은 문장' 비결
독일 문호 괴테가 희곡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82세 때였다. 자서전 《시와 진실》도 그해 탈고했다.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는 80세에 출간했다. 당대 사회의 실상과 인간의 구원을 깊게 다룬 걸작들을 황혼기에 쏟아냈으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요즘도 ‘만년의 열정’으로 대작을 집필하는 70~80대 작가가 많다.

소설가 조정래 씨(76)는 최근 200자 원고지 3600장 분량의 장편 《천년의 질문》(전 3권, 해냄출판사)을 펴냈다. 하루 12~13시간씩 사인펜으로 눌러 쓴 이 소설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작품이다. 그는 “3년 뒤 인간의 본질에 관한 소설을 쓰고, 또 3년 뒤엔 내세·영원 문제를 쓰겠다”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조정래·정소성·김주영·김녕희…

정소성 씨(75)는 34권 분량의 문학전집(문예바다) 중 1차분 《천년을 내리는 눈》 등 세 권을 먼저 내놨다. “다시 대작을 쓰려고 전집을 묶었다”는 그는 “세월의 세찬 파도를 뚫고 끝까지 살아남는 작품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전집 출간을 권한 동갑내기 소설가 백시종 씨(75)도 장편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 《물 위의 나무》(문예바다)를 잇달아 냈다.

80세 이상 소설가들도 팔팔하다. 《객주》의 작가 김주영 씨(80)는 호랑이 민담과 현대적 우화를 접목한 소설 《아무도 모르는 기적》(문학과지성사)을 펴내며 “어릴 때 들은 이야기를 이제야 썼는데, 가만 보니 소설가 정년이 80이라는 건 옛날 얘기”라고 했다. 한승원 씨(80)는 장편 《도깨비와 춤을》(위즈덤하우스)을 냈다.

1960~1980년대 신문 연재소설과 문예지 장편을 동시에 집필하며 인기를 모았던 김녕희 씨(83)도 소설집 《시간을 건너다》(인간과문학사) 등을 펴내며 왕성한 필력을 보이고 있다.

문단에서는 이들의 작품을 “원숙미와 젊은 감각을 겸비한 문장으로 인간과 사회의 양면을 깊고 넓게 조명한 성찰적 결실”이라고 평가한다. 나이를 넘어선 이들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미국 정신의학자 마크 아그로닌은 지혜와 회복탄력성, 창의성을 ‘노년의 세 가지 덕목’으로 꼽는다.

3대 덕목 아우른 '노년의 지혜'

그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경험에 따라 스스로 기능을 조절하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덕분에 나이 들수록 지혜의 폭을 넓혀 간다. 감정 조절 중추인 전전두피질로 스트레스 대응력을 키우고, 잠재된 해법을 다양하게 모색하는 확산적 사고로 창의성까지 향상시킨다. 이들 3요소의 합이 곧 ‘노년의 지혜’다.

고대 로마 문인이자 철학자인 키케로도 그랬다. 그는 《노년에 관하여》에서 “젊은이들이 배의 돛대에 기어오르고, 통로를 가로지르며, 갑판의 물을 빼는 동안 키를 잡고 조용히 고물(船尾)에 앉아 있는 노인이 진실로 중대하고 유익한 일을 한다”며 “인생의 큰일은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사려 깊은 지혜로 행하라”고 조언했다.

김녕희 소설집 《시간을 건너다》의 첫머리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홀로 남은 빈집에서 돌아가지 못할 회오와 결핍을 안고 쓰다듬듯이 10년을 쓰고 또 지우며 이 작품들을 완성했다. 수령 깊은 은행나무 잎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내년을 속삭이듯, 이번 작품집이 울림 긴 내 문학의 제4악장이기를 기대한다.”

그의 말처럼 “생의 노을빛이 스러질 때까지 눈 크게 뜨고 튼튼한 책상을 지키며” 빛나는 글을 쓰는 ‘젊은 원로’들이 많다. 그만큼 한국 문학의 지평이 넓어지고 수확이 풍성해졌다. 이들이 있어 새 밭에 씨앗을 뿌리는 차세대 작가들의 발걸음도 더없이 경쾌하고 풍요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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