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이곳에 3대에 걸친 가족 여섯 명의 묘지가 있다. ‘닥터 홀’로 불린 캐나다 의사 셔우드 홀 부부와 그 부모, 여동생·아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100여 년 전 조선에 와 병들고 가난한 사람에게 의술과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몸까지 바친 선교사 가족이다.

셔우드 홀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은 미국 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평양에 왔다. 뉴욕 퀸즈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출신 여의사 로제타와 함께 1892년부터 선교를 시작했다. 의료 봉사에 헌신하던 중 1894년 청일전쟁이 터졌다. 전쟁터가 된 평양에는 사상자가 넘쳤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들을 돌보던 제임스 홀은 과로와 발진티푸스로 1894년 11월 24일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나이 34세, 조선에 온 지 2년11개월, 결혼한 지 2년5개월 만이었다.

병원·학교 세우고 결핵 퇴치 외길

둘째를 임신 중이던 로제타 홀은 남편을 양화진에 묻고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두 살 된 아들과 갓난 딸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곧 딸을 풍토병으로 잃었다. 이런 아픔 속에서도 평양에 남편의 뜻을 기리는 병원을 짓고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건립했다. 서울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 의대의 전신)와 동대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인천에 기독교병원과 인천간호보건대학을 세웠다.

로제타의 첫 제자는 훗날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딴 박에스더였다.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까지 설립한 로제타는 85세로 세상을 떠난 뒤 남편과 딸이 묻힌 양화진 묘지에 안장됐다.

이들 부부의 헌신은 아들 셔우드 홀로 이어졌다. 1893년 조선에서 태어난 셔우드는 18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 마리안과 결혼한 뒤 1926년 돌아왔다. 맨 처음 한 일은 1928년 황해도 해주에 폐결핵 퇴치를 위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결핵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박에스더도 폐결핵으로 34세에 세상을 떠났다.

가족 6명 양화진 외인묘지 묻혀

셔우드 부부는 결핵 치료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932년 ‘크리스마스 실’을 국내 최초로 발행했다. 결핵협회를 만들어 위생교육과 치료·예방 운동도 벌였다. 그 와중에 1934년 9월 12일 태어난 아들 프랭크가 출생 직후 숨지는 바람에 양화진에 묻어야 했다. 1940년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앞둔 일본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됐다. 1984년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셔우드의 나이는 91세였다. 당시 대한결핵협회의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미국이나 캐나다에 묻지 말고 이 나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동생 아들이 잠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9월 19일 9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소원대로 양화진에 묻혔다. 부인 마리안도 석 달 뒤 95세로 별세해 남편 옆에 안장됐다. 이들의 장례는 대한결핵협회장(葬)으로 치러졌다. 이렇게 3대에 걸쳐 80년간 이 땅을 인술로 밝힌 홀가(家) 여섯 명이 양화진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이들이 생전에 그렇게 퇴치하려고 애썼던 결핵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한국의 결핵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70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1위다. 가장 낮은 미국(3.1명)의 20배가 넘는다. 북한은 10만 명당 513명으로 세계 6위다. 그래서 홀 일가의 결핵 퇴치 꿈은 아직 미완성이다. 양화진 묘역에 드리운 늦봄 오후의 해그림자가 길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