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진공관 라디오'의 추억
“우리가 그거 맹글면 안 되는 기요?”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1957년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 사무실. 연암(蓮庵) 구인회 락희화학공업 사장(LG그룹 창업회장)이 임원들에게 물었다. 윤욱현 기획실장이 제출한 전자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에 대해 임원들이 “우리 기술 수준이 낮아서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자 “기술이야 배워오면 되고, 안 되면 외국 기술자 델고 오면 될 거 아니오”라며 사업 추진을 지시했다.

국산 ‘동동구리무’ 럭키크림으로 시작한 락희화학은 당시 국내 플라스틱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입지가 탄탄했다. ‘전자(電子)’라는 용어가 낯설고, 전자제품도 미군들이 가져온 ‘제니스’ 라디오와 일본 ‘산요’ 라디오가 고작이던 시절 과감히 신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연암이 지시한 프로젝트는 이듬해인 1958년 10월 1일 국내 최초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현 LG전자) 설립으로 이어졌다. 금성사는 1년 만인 1959년 11월 국내 최초로 진공관 라디오 ‘A-501’을 내놓으며 한국 전자산업의 맹아(萌芽)를 틔웠다. 그해 생산량은 87대, 가격은 2만환이었다. 금성사 직원 월급(6000환) 석 달치 이상을 모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고가품이었다. 수입품보다 가격이 낮았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가 많지 않았던 데다, 부유층은 미국·일본산 제품만 찾았다.

위기에 빠진 금성사를 살린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1년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밀수품 단속과 함께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연 1만 대에 못 미쳤던 라디오 판매량은 1962년 13만7000대까지 늘어났다. 금성사는 1965년 냉장고, 1965년 전기밥솥, 1966년 흑백TV, 1968년 에어컨, 1969년 세탁기 등을 잇따라 선보이며 한국의 대표 전자기업으로 우뚝 섰다.

한국공학한림원이 해방 이후 70년을 집대성한 《한국산업기술발전사》를 펴냈다. 금성사의 ‘A-501’ 라디오를 비롯해 우리 산업의 초석이 된 11개 산업별 시초(始初) 기술과 제품을 망라했다.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고도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대동공업은 1963년 국내 최초 동력경운기를 생산해 농촌 근대화를 이끌었다. 1986년 세계 열 번째로 개발한 전전자교환기(TDX-1)와 1989년 1가구 1전화 보급은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의 반열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

시초 기술과 제품에는 ‘한강의 기적’을 일군 기업인과 기술자들의 도전정신과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요즘 많은 기업인이 안팎의 악재와 씨름하고 있다. 척박했던 환경을 딛고 ‘시초 기술’의 꽃을 피워낸 선배 세대의 개척자 정신에서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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