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2심에서도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통상임금 미지급분을 소급해 근로자에게 지급하면 심각한 경영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는 회사 측 호소는 반영되지 않았다. 경제계에서는 예정된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기업이 줄줄이 패소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번 판결에 대해 “승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법원 “경영난 단정하기 어렵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부장판사 윤승은)는 22일 기아차 근로자 2만7000여 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핵심 쟁점인 ‘신의성실의 원칙’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인정되지 않았다.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은 계약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고려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민법상 원칙이다.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회사에 중대한 경영 위기가 발생하면 미지급분을 소급해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된다.

재판부는 “기아차는 2016년부터 줄긴 했지만 2008~2018년 꾸준히 당기순이익을 남겼다”며 “2018년을 제외한 해당 기간의 연평균 당기순이익은 약 1조7591억원으로 사측이 주장하는 우발채무(약 1조672억원)를 모두 변제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2017년 한 해 매출(32조1098억원)과 비교해도 우발채무 비율이 3.3%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유동 비율이 꾸준히 증가해 단기간 내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늘었고, 이익잉여금이 2018년 기준 19조3513억원에 이르는 점 등도 고려됐다.

2심 재판부는 ‘어디까지 통상임금으로 봐야 할지’에 대한 판단 기준도 거의 바꾸지 않았다. 1심과 마찬가지로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휴게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한다는 판단도 이어갔다. 다만 중식 대금과 가족수당에 대해서는 원심과 달리 통상임금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날 판결이 신의칙에 대한 대법원의 ‘새 가이드라인’이 나온 뒤 첫 선고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14일 인천 시영운수 소속 버스기사 박모씨 등 22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청구 소송에서 “근로자의 요구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재계 “경영현실 외면한 판결”

재계는 2심에서도 신의칙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아차가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을 게 뻔히 예상되는데도 재판부가 이를 외면하고 노조 주장만 수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아차는 판결 직후 입장 자료를 내고 “신의칙이 인정되지 않은 선고 결과에 유감을 표한다”며 “선고 결과를 면밀하게 검토해 상고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약속을 깨고 소송한 당사자(노조 측)의 주장만 받아들여 기업에만 부담을 지우는 건 심히 유감스럽고 승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통상임금 범위를 포함한 각 기업의 임금체계는 노사 합의에 의해 결정됐는데 노조가 합의를 무시하고 통상임금 미지급분을 소급해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신의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일자리전략실장은 “이번 판결은 인건비 추가 부담으로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높여 국가 및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자동차업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고질적인 고임금·저효율에 짓눌린 한국 자동차산업이 이번 판결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완성차업체 노무담당 임원은 “기아차는 지난해 사상 최악 수준의 경영실적을 냈다”며 “올해 경영 실적은 지난해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전혀 감안하지 않은 판결”이라고 했다.

기아차는 통상임금 미지급분 소급 적용과 인건비 인상 등으로 1조원에 가까운 비용을 부담해야 할 판이다. 기아차는 1심 패소 직후인 2017년 3분기에 9777억원의 충당금을 쌓았다. 그만큼 인력 채용이나 연구개발(R&D) 투자에 쓸 자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판매 부진에 따른 경영난을 겪고 있는 기아차는 지난해 12월 생산직 채용을 시작했다가 최근 절차를 중단했을 정도로 경영 사정이 좋지 않다.

통상임금과 관련한 소송을 하고 있는 기업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현대중공업과 아시아나항공, 현대미포조선, 금호타이어, 두산인프라코어, 만도, 현대제철 등이다. 이런 추세라면 이들 기업이 소송에서 줄줄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기업들은 막대한 비용 부담을 떠안아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한경연은 2017년 종업원 450인 이상 기업 중 통상임금 소송을 하고 있는 35개 기업이 소송에서 모두 지면 8조3673억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종업원 450인 미만 기업까지 더하면 기업이 10조원 넘게 부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신의성실의 원칙

계약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이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할 때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고려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민법(제2조 1항)상 원칙. 대법원은 2013년 근로자의 통상임금 소급 적용 청구로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위기가 발생하면 이 원칙에 위배돼 허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도병욱/신연수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