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의 움직임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겁다. 지난해 6월 신흥국 위기 가능성이 불거지자 달러당 107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1120원대로 3%가량 뛰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 이후 8개월 동안은 1115~1135원 선의 박스권을 지키며 ‘옆걸음’을 치고 있다. 전 세계 주요 통화와 견줘도 최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환율 상승과 하락 요인이 혼재하면서 방향성을 못 찾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이 다른 신흥국에 비해 안전하다’는 인식이 원·달러 환율이 튀는 것(원화 약세)을 억누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락세(원화 강세)로 이어지기엔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수출 감소와 경기 하강 우려가 크다. 상반기 동안은 이 같은 팽팽한 흐름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환율 변동폭 20여년 만에 최저…대외 충격에 맷집 세졌다
8개월째 잠잠…맷집 세진 원화

1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원·달러 환율은 0.12% 오르는 데 그쳤다. 반기 기준으로 변동 폭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최저 수준이라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환율은 이전까지 널뛰기를 보여왔다. 2016년 하반기 5.48% 상승했다가 2017년 상반기엔 5.27% 하락했다. 또 같은 해 하반기엔 6.48% 떨어졌다가 작년 상반기엔 4.11% 올랐다. 그러다 지난해 하반기 들어 갑자기 0%대로 잠잠해졌다. 원·달러 환율의 변동 폭은 이 기간 주요 30개국 중 싱가포르(-0.0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위안·달러 환율은 3.63%, 유로·달러 환율은 2.09% 올랐고 엔·달러 환율은 0.95% 떨어졌다. 원·달러 환율은 이 기간 최저치 대비 최고치 비율을 따져도 세계 최저 수준이다. 글로벌 경기에 대한 우려나 안도감이 부각되면서 다른 나라 화폐가치가 급등락하는 동안에 움직임이 가장 둔했다는 얘기다.

외환 전문가들은 “여전히 하루 변동 폭이 크고 단기 충격에는 취약한 측면이 있어 안전자산으로 취급받는다고 보기는 힘들다”면서도 “외환보유액이 늘고 북한 리스크가 줄면서 대외 충격에 대한 맷집이 눈에 띄게 세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 변동 폭은 올 들어 더 낮아졌다. 장기간 횡보하다 보니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1130원을 넘어서면 고점이라는 인식이 강해져 수출 네고(달러 매도) 물량이 나온다. 반대로 1110원대로 밀리면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에 수입 결제 물량(달러 매수)이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박스권은 더 단단해지고 있다.

환율 상승·하락 요인 팽팽

글로벌 경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데도 원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 자금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어서다. ‘신흥국 중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국부펀드 등의 한국물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내외 금리 차가 커진 가운데 외환 스와프레이트(현물환과 선물환율의 차이)가 낮아진 데 따른 영향으로 외화자금을 조달해 원화채권을 매입하는 차익 거래도 활발하다.

원·달러 환율의 콜옵션과 풋옵션의 수요 차이를 나타내는 원화 리스크리버설은 올 들어 지난 10년 새 최저 수준까지 하락했다. 이 수치가 낮아질수록 앞으로 환율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환율 하락을 가로막는 요인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 경기를 떠받쳐온 수출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수출 주력 품목인 반도체 가격이 꺾인 데다 한국 수출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중국이 경기 둔화 우려에 휩싸여 있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원화 리스크리버설, CDS(신용부도스와프) 프리미엄이 하락했지만 앞으로 한국과 세계 경기 상황을 볼 때 환율이 하락세로 돌아서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봤다. 서정훈 KEB하나은행 연구위원은 “상반기까지는 박스권을 유지하다가 하반기 들어 미국 등 선진국의 경기 둔화 가능성이 본격 확인되면 상승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