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애너벨 리' 시인의 우주적 상상력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는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네.’

미국 낭만주의 거장인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시 ‘애너벨 리’ 첫 부분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가슴 설레며 암송했던 이 시는 아름다운 사랑 노래이자 가슴 아픈 비가(悲歌)다. 포는 이 시를 1847년 세상을 떠난 아내 버지니아를 위해 썼다.

시 중간에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와 같은 우주적 이미지가 여러 번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도 ‘달’과 ‘별’이 등장한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170년 전에 "대폭발로 별 탄생"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주 ‘천체’로 향했다. 낮에는 편집자로 일하고 밤에는 작품을 쓰면서 대공황기의 가난을 견디던 그에게 ‘하늘’은 ‘지상’과 대비되는 희망의 창이었다. SF(공상과학소설)와 추리소설 분야를 개척한 것도 이 덕분인지 모른다.

그가 버지니아를 잃은 이듬해 출간한 《유레카》는 천체를 다룬 우주론이다. 170년 전인 1848년에 펴낸 이 책에서 그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관점을 보여줬다. “우주는 하나의 공과 같은 물체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이 폭발해 퍼짐으로써 별들이 생겼다. 언젠가 우주는 다시 중심을 향해 붕괴되고 결국엔 소멸된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빅뱅 이론’이다. 우주팽창론이 나온 1927년보다 80여 년 전에 벌써 이를 언급했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은하(銀河)가 수많은 은하계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안드로메다 같은 나선은하가 우리 은하와 별도의 천체인지 우리 은하 내의 성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은하를 단순한 별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 떨어져 형성된 ‘섬 우주’라고 표현한 대목이 흥미롭다. 그는 우주가 극한에 이르러 다시 폭발할 것이라며 ‘블랙홀’의 존재를 암시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도 암시

공간과 시간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생소한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과학자도 아닌 문인이 이런 소리를 해대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이야 과학의 힘으로 입증된 게 많지만, 당시에는 이를 뒷받침할 근거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상상력은 후세 작가와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1828~1905)은 포가 쓴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원전 삼아 속편을 여러 권 썼다. 1865년에 발표한 《달세계 일주》는 20세기 인류의 달 착륙과 우주 탐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포의 상상력은 ‘밤하늘이 왜 검은가’ 같은 일상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베른 역시 포의 영감에서 달나라를 향해 쏘아올리는 로켓을 착상했다. 두 사람 다 기술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었다. 우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래전에 깊이 생각하고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오는 7일로 다가온 포의 기일을 맞아 인문학적 상상력의 경계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인류 미래의 탁월한 성취를 이룰 과학과 문학의 ‘위대한 만남’은 또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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