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지난 3월 “경기 하남에 세상에 없는, 아마존을 능가하는 최첨단 온라인센터를 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신세계 온라인센터가 들어설 부지 인근 주민들이 교통정체 등을 이유로 반대하자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가 신세계에 계획 철회를 압박했다. 김상호 신임 하남시장도 신세계 온라인센터에 대해 미온적이다. 미국 아마존이 본사를 추가로 짓겠다고 하자 수십 개 도시가 유치전에 나선 것과 완전히 다르다.

국내 유통업체들이 정치권 눈치보기와 정부의 이중삼중 유통규제에 발목을 잡혀 혁신성장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의 글로벌 유통업계는 혁명적 수준으로 변신하고 있다.

영국 온라인 슈퍼마켓 1위 오카도는 런던 인근에 최첨단 물류센터를 잇달아 짓고 컨베이어벨트 대신 무인로봇 수천 대로 물류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있다. 오카도는 과감한 투자와 기술혁신으로 7년째 흑자를 내고 있다.

오카도의 스마트 플랫폼을 배우기 위해 세계 유통기업들이 앞다퉈 손을 내밀자 ‘아마존 킬러’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오카도는 인공지능(AI) 주문 시스템 등 혁신 기술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무인배송 트럭도 시범 운영 중이다.

아마존은 작년 6월 식료품체인 홀푸드를 인수한 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계산대 없는 무인 편의점 ‘아마존 고’가 미국 주요 도시에 속속 생기고 있고, 아마존 온라인에서 구매한 물건을 홀푸드 매장에서 찾는 ‘옴니채널’도 확대 중이다.

중국의 알리바바는 30분 이내 배송, 안면인식 무인 결제 등 첨단 기술을 집약한 식료품점 허마셴성을 대도시 곳곳에 짓고 있다. 독일계 할인점 알디와 리들은 품질은 같은데 가격은 반값인 자체상표(PB)로 미국 영국 호주 등 글로벌 시장을 잠식 중이다.

이 같은 세계적인 유통산업의 변화 흐름 속에 국내에서도 유통업을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혁신과 성장을 주도하는 미래산업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전형적인 내수 산업이었던 유통이 정보통신기술(ICT) 발전과 맞물려 수출산업, 관광산업, 고용창출 산업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오프라인 매장에선 체험만 하고 구매는 저렴한 온라인에서 하는 식으로 글로벌 유통산업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고 있는데 국내에선 점포 규모와 입지 등으로 규제하는 낡은 틀에서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며 “유통산업을 글로벌 흐름에 맞게 재정의한 뒤 정책을 완전히 다시 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또 “한국이 정보기술(IT) 강국인데 물류, 결제 등 유통을 뒷받침하는 인프라는 한참 뒤처져 있다”며 “규제만 할 게 아니라 혁신을 지원할 논의도 시작할 때”라고 덧붙였다.

런던·베이징=안재광/김보라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