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호찌민과 경주
안남(安南)은 중국에서 베트남을 지칭하던 옛 이름이다. 본래 교주(交州)였는데, 679년 당나라가 안남도호부를 하노이 일대에 설치한 데서 유래했다. 이 지역은 10세기 중국에서 독립한 뒤 대남(大南), 대월(大越) 등으로 불렸다.

19세기 초 응우옌(阮) 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해 국호가 월남(越南)이 됐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엔 북부 통킹(한자로 東京), 남부 코친차이나(交趾支那), 중부 안남으로 나뉘었다. 한국의 장년층은 안남 하면 구호미였던 ‘안남미(米)’부터 떠올릴 것이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장립종 인디카 쌀이다.

베트남과의 첫 교류는 고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127년 안남국 리(李) 왕조의 왕자 이양흔, 1226년 이용상이 정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해 각각 정선 이씨,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조선에선 주로 중국에 파견된 양국 사신 간 교류가 많았다. 성종 때(1488년) 서거정이 베이징에서 안남국 사신을 만나 시를 주고받은 기록이 있다.

1597년 이수광은 베이징에서 안남국 사신과 필담으로 시를 주고받았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가 무역상에 팔린 선비 조완벽이 1604~1607년 세 차례 안남국을 다녀온 뒤 귀국해 이수광의 시가 현지에서 인기라고 전했다. 이 얘기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1687년 제주 사람 김태황이 안남국에 표류했다가 귀환하는 과정에서 안남국의 교역 요청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렇듯 양국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근대에는 인연이 끊겼다.

잘못 알려진 일화도 많다. 베트남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제갈량의 ‘칠종칠금’에 등장하는 월나라가 지금 베트남이란 주장이다. 촉한 성도에서 하노이까지는 왕복 2000㎞에 달하고, 험준한 산과 밀림에 막혀 있다. 제갈량이 양쯔강 이남 지역을 제압했다는 게 정설이다.

베트남 국부(國父) 호찌민이 전쟁 중에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탐독했다는 설도 입증된 게 아니다. 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 호찌민의 행적과 자료 어디에도 《목민심서》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베트남어로 번역됐다는 소식도 없다.

어쨌든 한국과 베트남은 월남전 악연을 딛고, 1992년 수교해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교역액(지난해 451억달러)이 중국, 미국, 일본 다음이다. 음식과 국제결혼으로 친숙하고 한류 팬도 많다.

마침 양국 우호를 돈독히 할 국제이벤트가 열린다. 경북 경주시와 호찌민시가 공동 주최하는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이 내달 11일~12월3일 호찌민 중심가에서 펼쳐진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와 연계돼 국제 주목도도 높다. 중국의 사드 보복 이후 베트남 등 아세안에 더 눈길이 간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