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의 데스크 시각] 보이지 않는 엔진의 시대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흑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 중 하나가 노키아다. 2011년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구원투수 역할을 맡은 스테판 엘롭 최고경영자(CEO)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이메일을 전직원에게 보낸다. 그는 노키아를 ‘불타는 플랫폼’에 빗대면서 “경쟁사들이 휴대폰 기기를 가지고 우리의 시장점유율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전체 생태계 경쟁력으로 우리 몫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부르짖었다.

엘롭 CEO의 참회는 결과적으로는 너무 늦은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의 진단은 정확했다. 휴대폰뿐만 아니라 지금 산업계는 온통 생태계, 곧 플랫폼 전쟁터가 되고 있다. 스콧 갤러웨이 미국 뉴욕대 교수의 표현대로 구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등 이른바 ‘디지털 4인방(Gang of Four)’이 거대한 플랫폼을 무기로 주무르는 세상이다.

플랫폼 전쟁터가 된 산업계

정거장을 뜻하는 플랫폼은 우리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자,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규모가 크고 중요한 플랫폼일수록 연결망이 촘촘하다.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방문객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품과 서비스 교환을 통해 생태계가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플랫폼 운영 기업은 모든 참여자의 정보, 즉 데이터를 장악하게 된다.

국내에서도 플랫폼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금융권의 ‘슈퍼 메기’로 등장한 카카오뱅크가 그것이다. 카카오뱅크가 인터넷전문은행 선발주자인 K뱅크에 비해 몇 배 빠른 속도로 돌풍을 일으키는 것도 플랫폼의 힘이다. 4200만 명 카카오톡 가입자를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 효과와 모바일 큐레이션 능력이 금융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카뱅 신드롬’에 자극받은 은행들이 저마다 모바일뱅킹 앱(응용프로그램) 개편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플랫폼 경제 시대, 기업과 규제 당국 모두 발상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우선 ‘제품 중심’ 사고에서 개방, 연결, 협력, 공유를 먼저 떠올리는 ‘플랫폼 중심’ 사고로의 전환이다.

호텔 객실 하나 보유하고 있지 않은 에어비앤비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투숙객을 확보할 수 있고, 차량 한 대 없는 우버가 세계 최대 운송 네트워크 회사가 될 수 있는 게 플랫폼 경제의 마법이다.

플랫폼 중심 사고로 전환

연구개발(R&D) 패턴도 바뀌게 될 것이다. 비용과 시간에서 큰 부담이 되는 R&D 대신 외부 기술과 아이디어를 내부 역량과 연결하는 ‘C(connect)&D’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C&D를 가장 잘 활용하는 곳 중 하나가 구글의 비밀 연구소 ‘구글 X’다. 우버나 핀테크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더 편리하고 더 저렴한 것을 지향하는 소비자의 요구를 궁극적으로 막긴 어렵다. 세계적인 흐름에 우리만 뒤처지는 ‘갈라파고스화’의 우려도 크다. 정부 규제에도 ‘2.0 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플랫폼 전파자를 IT업계에서는 ‘에반젤리스트(전도사)’라는 종교적 용어로 부른다. 애플의 최고 에반젤리스트는 스티브 잡스였다. 카카오뱅크 돌풍에는 보험업계와 인터넷 기업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윤호영 공동대표 같은 경영인이 큰 역할을 했다. 플랫폼이라는 ‘보이지 않는 엔진’의 속성과 힘을 이해한 기업과 국가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

윤성민 IT과학부장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