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용산(龍山)
‘용산(龍山)’ 하면 많은 이들이 미군 기지와 이태원, 전자상가를 떠올린다. 요즘엔 경리단길 맛집을 얘기하는 젊은이도 많아졌다. 미군의 평택기지 이전이 본격화하면서 용산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용산은 인왕산(仁王山)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져 마포구와 용산구에 형성된 산지의 조그마한 봉우리 이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지명 유래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갈래다. 하나는 산세가 용이 서린 형체와 같다는 데서 왔다는 설, 또 하나는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문헌에 따르면 용산은 고려 숙종 7년(1102년) 남쪽 수도인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물망에 올랐다. 그만큼 한강을 배경으로 한 풍광이 뛰어났고,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전국의 세곡 등을 실어나르던 조운선(漕運船)이 몰려들며 큰 포구로 발전했다. 한강에서 활약한 경강상인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개항기인 1884년 10월(고종 21년)엔 외국인 거주와 통상이 허용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돼 프랑스인, 중국인, 일본인 등의 상거래 활동도 활발했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뜨고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 구간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근대 문물을 먼저 접한 지역이기도 하다.

애환도 많이 서려 있다. 평지가 많은 교통의 요지, 한양도성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외침 세력의 표적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이곳에 숙영지를 세운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삼각지 등 용산 일대의 토지를 헐값에 강제 수용했다.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건설해 한반도 통치와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도 삼았다. 일본의 침탈에 앞서 1882년에는 청나라 위안스카이 군대가 임오군란 진압을 빌미로 용산에 주둔하며 온갖 패악질과 내정간섭을 일삼았다. 13세기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나 16세기 임진왜란 때도 몽골군과 왜군이 용산에 머물렀다.

정부와 서울시는 올해 말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완료되면 이 지역을 영국 하이드파크나 미국 센트럴파크처럼 세계적인 ‘용산공원’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과 비슷한 243만㎡의 땅을 시민 휴식을 위한 ‘한국판 센트럴파크’로 단장한다는 것이다. 용산공원은 1992년 11월 옛 미군 골프장 터에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 및 용산가족공원과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용의 순우리말 ‘미르’를 접목한 용산아트홀 미르극장도 있다. 영욕의 역사를 지닌 용산이 과거의 그늘을 벗어나 희망찬 미래의 공원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김수언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