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파르헤시아'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타자에게 반드시 조언 또는 충고를 해야 하거나 정반대로 타자의 비판적 충고를 경청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그런데 충고의 경우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과 권력 관계에 따라 매우 미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직언을 해야 할 때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에서부터 기원후 4세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략 1000년 동안 사용돼 온 ‘파르헤시아(parrhesia)’라는 단어가 있다. 목숨 내놓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를 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윤리적 덕목을 지칭한다. 파르헤시아에는 여러 상황과 유형이 존재하나, 그 진수는 죽음의 놀이를 감수하며 서열이 낮은 사람이 오직 진실만을 밝히기 위해 권력자를 향해 모든 것을 거침없이 내뱉는 담대한 언어 행위다. 20세기 프랑스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사상가라 할 수 있는 미셸 푸코(1926~1984)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타계하기 직전까지 이 문제에 천착해 이 단어의 계보를 통치술과 자기 돌봄 기술의 맥락에 적용한 장본인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총체적 난국에 이른 원인과 해법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으나 서양의 언어사상을 연구해온 학자로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다. 지금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비롯해 한국 현대사에서 비극적 상황을 낳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최고 결정권자에게 목숨을 걸고 담대한 직언을 했어야 할 우리의 정치 엘리트와 관료들이 최고 권력자의 그릇된 판단이나 결정을 애써 모른 체하고, 수수방관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파르헤시아를 실천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예속보다는 자유를, 정교한 수사의 무늬를 갖춘 설득보다는 진솔함을, 허위나 침묵보다는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극단적 상황에서 그것의 실천자는 안일한 삶과 안전보다는 스스로 예감하고 있는 죽음의 위협마저 감수하는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윗사람에 대한 찬사보다는 비판을 선택하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거나 도덕적 무기력에 빠지기보다는 도덕적 의무를 선택한다.

어떤 경우건 파르헤시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정치적 미덕이며 자유로운 인간의 미덕으로 손꼽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어떤 미덕을 가능케 하는 으뜸 미덕으로 보았다. 파르헤시아가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시민들이 침묵하는 굴종에 기초한 전체주의적 광기를 막을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파르헤시아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주인들, 즉 통치자들의 아둔함을 감수해야 한다. 정상인이 미친 사람들과 더불어 미쳐가고 총명한 인간이 천치들과 더불어 천치가 돼가는 상황보다 더 잔혹한 것은 없다고 푸코는 설파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헤시아는 정치 집단이나 개인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도덕적 청량제이며 집단의 아둔함과 광기를 막을 수 있는 제어장치라 할 수 있다.

파르헤시아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철학적 파르헤시아는 자아와의 진정한 관계, 즉 자기 돌봄이다. 그것은 말과 삶의 조화이며 또한 미덕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인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자기 돌봄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부당함을 거부한 명분이다. 오늘날의 말로, 소크라테스의 파르헤시아는 ‘시민 불복종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파르헤시아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통치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정치적 출세나 소영웅주의에 기인한 그것의 오용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러므로 파르헤시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조건이 있다. 즉 진실과 믿을 만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그는 비판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때로는 대중적 여론이나 인기 영합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진실을 말하는 그 같은 언어 행위를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의무라고 체감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파르헤시아를 실천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다.

김성도 < 고려대 교수·언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