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기적이고 자율적인 R&D 문화 다져야
18세기 증기기관이 발명된 뒤 비약적인 기술 발전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시장경제이론이 기술과 결합해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탄생시켰다. 산업혁명도 이때 일어났다. 과학기술의 성공 이면에는 언제나 이를 뒷받침하는 철학이 존재했고, 사회적인 제도가 기술 발전을 견인해 왔다.

한국의 역대 모든 정권은 과학기술을 중흥·발전시켜야 한다는 구호를 초정파적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정책과 과학기술 분야 수장들까지도 바뀌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많은 연구예산이 투입됐더라도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과학기술은 전문성이 높은 분야다. 연구결과의 심층적인 평가도 어렵고, 정부가 연구방향을 선도적으로 설정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그 속성상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과학기술의 진보가 현저하게 이뤄질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정부출연연구소는 주인 없는 기관으로 안주하게 되고, 연구 현장에서는 ‘공유지의 비극’ 같은 현상마저 일어나기도 했다.

그동안 정부가 쏟아낸 대부분의 과학기술 정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행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가난했던 시절과 고도 성장기에 국가 자원을 과학기술분야에 배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통치자의 결단에 의존했다. 통치자가 정책이나 법률까지도 조정할 수 있었다. 여기에 현장 과학기술자들의 간절한 애국심이 더해져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정치와 과학기술의 우호적인 관계가 한국 과학기술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시스템의 활력이 떨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정부 지원에 안주하면서 연구기관 고유의 발전을 추구하지 못해 자생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런 부작용을 방지하려면 정부는 연구기관장의 임기를 장기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물론 개혁적이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에 한해서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전문연구종사자들이 정부 정책 수립에 직접 참여하는 관리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이는 정권 차원의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 관료와 과학기술자 집단은 공공의 목적과 시장의 논리 및 연구소 구성원들의 이해가 일치하는 최적점을 찾아야 한다.

이세돌 9단과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 대국이 시사하듯이 과학기술인들만큼은 탁월성과 수월성이 중요하다. 그것은 연구결과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공공기관의 획일적인 규제로는 이를 담보할 수 없다. 공모를 통해 선발된 연구기관장이 임기 동안 정부와 협의 없이는 기관을 운영할 수 없는 현실에서는 소신과 철학이 연구정책에 반영되기도 어렵고, 경우에 따라 10년 이상 걸리는 정책 효과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일부 연구기관장들은 정치적인 영향과 주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지원하되 간섭은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부라도 시장의 논리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유능하다고 판명된 과학기술계 수장들은 정권에 관계없이 장기적으로 임기를 보장해 일관된 정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송치성 < 한국기계연구원 책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