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사진작가 김진홍씨의 개인전 '백두산의 사계'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19일 까지 열린다. 백두산에 펼쳐진 황홀한 무지개와 헬기를 타고 4,000m 상공에서 바라본 장엄하고 경이로운 백두산의 모습 등 40여점을 만나 볼 수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최근 배우 전승재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의식 불명 상태라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KBS '고려거란전쟁' 촬영 대기 중 쓰러져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받았으나 3개월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입시 강사 '삽자루' 유형철 씨는 202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지속하다 최근 세상을 떠났다. 원로배우 오현경도 뇌출혈로 투병하다 별세했다.이경규는 최근 유튜브를 통해 "안동에서 치과 하는 친구가 있는데 친구가 '경규야 생일 축하해'라고 한 뒤 말이 어눌해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며 "뇌출혈이 왔는데 내가 친구를 업고 뛰어서 골든타임에 병원에 잘 도착해 살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린 경험을 공유했다.뇌혈관질환을 포괄하는 뇌졸중은 어느 날 갑자기,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질병이다. 국내에서만 연간 10만명 이상의 뇌졸중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가파른 고령화 추세에 환자와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뇌를 유지하는 데는 전체 에너지의 25%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많은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뇌 안엔 다수의 혈관이 분포되어 있다. 뇌졸중은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뇌 조직이 손상되는 질환이다. 뇌혈관이 막혀 뇌 일부가 손상되면 '뇌경색'이고, 뇌혈관이 파열돼 뇌 속에 혈액이 고이면서 뇌가 손상되면 '뇌출혈'로 분류한다.신경과 전문의 박지현 세란병원 부원장은 "두통은 뇌경색보다는 뇌출혈에서 좀 더 많이 발생한다. 뇌경색은 크기가 크면 두통이 올 수 있는데 대게 마비 증상이 동반된다. 뇌출혈은 두통 단일 증상이 많다. 뇌졸중 시 두통이 왔을 때는 뇌출혈을 의
"경복궁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빌려 입는 한복들은 실제 한복 구조와 맞지 않거나 '국적 불명'인 경우가 많습니다."지난 7일 최응천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장이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날 최 청장은 새로 출범하게 된 국가유산청을 소개하며 "궁궐 일대의 한복 문화를 개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무형문화재이기도 한 한복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고 개선할 시점"이라며 "경복궁 주변 한복점 현황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속치마에 철사 후프를 과도하게 넣어 부풀린 형태, 치마의 '말기(가슴 부분의 띠)' 부분까지 금박 무늬를 넣은 형태, 전통 혼례복에서나 볼법한 허리 뒤로 묶는 옷고름 등의 변형 등이 있는 퓨전 한복은 전통 한복의 고유성을 해친다는 지적이다. 최 청장의 한복 지적에 누리꾼들은 "광화문 지날 때마다 형형색색 한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퓨전한복도 시대 흐름에 따른 새로운 한복의 일종이다", "아무리 개량해도 외국인들이 '한푸(중국 전통 의상)'와 구분 못하면 어쩌냐" 등의 반응을 내놨다. 17일 경복궁을 찾은 관광객과 한복 대여점을 운영하는 상인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이날 오후 1시30분께 경복궁 일대에는 관광객들이 한복을 빌려 입은 채 고궁박물관과 경복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특히 경복궁이 생소한 외국인 관람객은 대부분 퓨전 한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한복을 입고 경복궁 앞 수문장 교대식을 관람하던 20대 미국인 관광객 에이미 씨는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큰 궁궐이 있어 놀랐다"며 "한복까지 입으니 시간여행을 한 것 같다"며 고궁 관람에
“엄마는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어. 언제까지 이렇게 결혼 안 하고 엄마 속만 썩일래?”또다시 시작된 엄마의 결혼 독촉. “네 나이가 지금 몇이야. 어휴, 저거 얼굴에 주름 좀 봐. 어떡해. 너 지금보다 더 나이 들면 진짜 후회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딸은 조용히 일어나 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대화는 여기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습니다. 딸을 좇아 계단을 뛰어 올라온 엄마는 기어코 한마디를 더 했습니다. “선 자리도 안 나가고.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이처럼 굴 거야? 그림은 무슨 그림! 네 그림은 그냥 아마추어 수준이야. 헛꿈 꾸지 마!”딸은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쾅 닫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의 가시 돋친 말보다 더 속상했던 건, 그 말속에 사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딸의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 유명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아직도 멀기만 해 보였습니다. 결혼이 마냥 싫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도 마음이 가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남자, 에두아르 마네는 유부남이었으니까요.훗날 위대한 화가이자 인상주의자의 핵심으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베르트 모리조(1841~1895)에게도 이런 우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모리조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그림 실력, 감당할 수 있으세요?”모리조는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분입니다. 아버지는 존경받는 공직자이자 고소득자였고, 어머니 쪽 집안은 더 좋았습니다. 덕분에 모리조에게는 유명한 친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