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애국지사 석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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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천자 칼럼] 애국지사 석호필](https://img.hankyung.com/photo/201602/AA.11338028.1.jpg)
감옥 설계도를 온몸에 암호로 문신해 형을 찾아들어간 동생이 마이클 스코필드(Schofield)였다. 프리즌 브레이크 열풍 때 곳곳에서 한국식으로 ‘석호필, 석호필…’ 했다. 하지만 원조 석호필은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 박사다. 토론토에서 세균학을 전공해 일제 강점기인 1916년부터 세브란스 의전에서 근대 의학을 가르친 캐나다 인물이다.
생전에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한 스코필드 박사의 도전적인 삶은 구한말의 실천적 지식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닮았다. 연세대의 기초를 닦은 언더우드 박사도 원음을 살린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Underwood)를 즐겨 썼다. 이 땅의 선각자요 계몽가였던 이들은 대학에서 세균학,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과학으로 전근대 미몽사회의 구각(舊殼)깨기를 시도한 것이다. 한 세기를 앞서 살아간 석호필·원두우 두 코스모폴리탄의 원태생은 모두 영국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때 ‘대영제국’으로 불리던 나라의 지적 저력에 인류보편적 헌신 기풍까지 엿보인다. 세계를 제패한 힘이 단지 총포와 군함, 혹은 증기기관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조 석호필, 스코필드 박사가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3·1운동을 돕고, 만세운동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서대문형무소로 독립운동가들을 찾아가 격려했고, 당시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한 공로다. 한국인도 못한 일을 벽안의 의학자가 해냈다.
일제의 감시에 살해 위협까지 받은 그는 1920년 식민지 조선을 떠났지만 1958년 우리 정부의 초청에 따라 국빈자격으로 돌어와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로 재직했다. 이땅에서 삶을 마감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단순히 국빈이 아니라 애국지사였고 건국 공헌자였다. 3월 한 달 독립기념관에서 석호필가(家) 사진 등 그와 관련된 자료 11점이 전시된다. 진정 고마울 따름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