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업체로 시작해 타미플루 생산…과감한 R&D로 일군 '항암제 명가'
신종인플루엔자가 세계를 휩쓴 2009년. 새로운 형태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공인된 치료제인 타미플루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타미플루를 생산하는 스위스 제약업체 로슈는 그해 33억달러(약 3조7690억원)가 넘는 매출을 올렸다. 로슈가 타미플루를 생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십년간 매출의 20%가량을 꾸준히 연구개발(R&D)에 투자한 결과였다.

비타민업체로 시작해 타미플루 생산…과감한 R&D로 일군 '항암제 명가'
작년 11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R&D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글로벌 기업을 꼽았다. 1위는 정보기술(IT) 기업 인텔이었다. 2위가 로슈였다.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이 인텔(20%)과 1%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로슈는 지난해 R&D에 90억달러를 투자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예산(약 11조1000억원)과 맞먹는다. 글로벌 기업의 혁신성을 판가름하는 지표가 R&D 투자 규모라는 게 로슈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비타민업체에서 글로벌 ‘빅3’ 제약사로

1896년 프리츠 호프만이 세운 로슈는 비타민 생산업체로 출발했다. 종합 비타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최초의 기업이었다. 로슈는 창립 때 자리 잡은 바젤에서 119년째 사업을 하고 있다. 단 한번도 본사를 옮기지 않았다.

비타민업체로 시작해 타미플루 생산…과감한 R&D로 일군 '항암제 명가'
경영철학도 비슷하다. 대개 글로벌 기업이 외치는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라’는 구호와 거리가 있다. 제약산업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려면 약 10억달러의 비용이 들어간다. 기간도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 이상 걸린다.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신약을 생산하기 어렵단 얘기다.

세베린 슈완 로슈 최고경영자(CEO)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규모 R&D 투자 때문에 항상 생산성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단기 성과를 보는 투자자들은 생산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세워 추진하는 R&D는 결국 기업의 중장기적인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 전략적 방향이 옳다는 걸 각종 수치로 증명하고 있다.”

슈완 CEO의 이런 경영철학은 창립이념이기도 하다. 119년간 지킨 창립이념은 로슈가 연매출 467억스위스프랑(약 56조5120억원)의 글로벌 ‘빅3’ 제약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원천이 됐다.

매년 매출의 20%는 R&D에 투자

비타민업체로 시작해 타미플루 생산…과감한 R&D로 일군 '항암제 명가'
로슈의 최우선 순위는 환자다. 새로운 의약품과 진단기술을 개발해 환자의 삶을 연장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단순히 삶을 연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다. 세계 질병의 3분의 2가량은 아직 적절한 치료제가 없다. 로슈는 제약업체가 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은 더 나은 의약품을 개발하고 진단기술을 보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이 의료진, 로슈 주주, 환자 그리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로슈는 항암, 면역, 안과, 감염 분야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엔 신경계 질환 치료제 개발에도 집중하고 있다. 작년 기준 로슈의 R&D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전문가만 1만8000여명이다. 임상에 참여한 환자는 36만7300여명, 로슈의 주요 제품으로 치료받은 환자는 약 2000만명으로 집계됐다.

항암제 연구와 개발에서는 로슈에 세계 최초라는 기록이 늘 따라다닌다. 1962년 자체 개발한 첫 항암제인 플로로라실을 출시했다. 이후 투자를 지속해 1990년대 중반 이후 잇따라 새로운 항암제를 내놨다. 혈관 형성 억제 대장암 치료제인 아바스틴과 유방암 표적항암제 허셉틴 모두 세계 최초로 로슈가 선보였다.

의학계에서 발견한 암 종류는 250여종이다. 암은 단일하거나 정적인 질환이 아니다. 이 때문에 치료제 개발 때 복잡한 전이와 발전 과정까지 고려해야 한다. ‘항암제 명가(名家)’라는 타이틀처럼 로슈의 항암제 생산라인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경부암 등 5대 암에 집중돼 있다. 여기에 흑색종 등 희귀암 라인도 확대하고 있다. 로슈 전체 R&D 투자의 절반가량이 항암제 개발에 쓰인다.

최우선 순위는 환자…맞춤 의료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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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슈가 최근 집중하는 분야는 맞춤 의료다. 같은 진단을 받은 환자라도 치료에 대한 반응은 다를 수 있다. 로슈는 점차 세분화돼가는 환자들의 차이를 분석해 치료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료제 개발 단계부터 제약부문과 진단부문의 긴밀한 협력을 장려하는 이유다.

로슈는 맞춤 의료를 통해 치료 비용 대비 효율성 향상을 추구한다. 치료 비용 대비 효율성을 높인다는 건 불필요한 치료를 피한다는 의미다. 환자들의 삶의 질까지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슈는 ‘장수 기업’의 체질은 다양한 배경의 직원들이 각자의 장점을 살릴 때 형성된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직원들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근무환경 조성에 힘쓰고 있다. 종교, 연령, 성별, 경험, 사고방식, 성장 배경 등으로 직원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는다. 전체 임원의 절반이 여성인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슈완 CEO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다양성과 포용은 혁신의 필수 요소”라며 “기업의 혁신을 위해서는 직원들이 다양한 사고를 갖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린이를 위한 걷기 대회’는 로슈의 대표적인 사회공헌활동이다. 아프리카 어린이을 지원하기 위해 2003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100여개국에서 11만5000여명의 로슈 직원이 참여해 지금까지 960만스위스프랑을 모았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