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끝없는 열정으로 도전…'車 왕국' 건설한 발명왕
동양인 중 처음으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 자신의 성을 딴 자동차 회사 혼다를 창업한 사업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기술자. 일본 모터스포츠의 성지인 스즈카 포뮬러원(F1) 경주장의 설립자. 혼다 소이치로 회장을 설명하는 수식어들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말들이 따라 붙지만 소이치로는 단 하나로만 불리길 원했다. 바로 기술의 혼다 소이치로다. 혼다는 끊임없는 노력과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엔지니어와 기업가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포뮬러원(F1) 프로토타입(시험모델)을 개발한 혼다 소이치로 회장. 혼다코리아 제공
포뮬러원(F1) 프로토타입(시험모델)을 개발한 혼다 소이치로 회장. 혼다코리아 제공
혼다와 자동차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6년 태어난 혼다는 시즈오카현 근처의 작은 마을 하마마츠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하는 철공소에서 금속 조각으로 장난감을 만들며 놀았다.

혼다는 6세 때 마을 어귀에서 처음 포드의 대량생산 차량 ‘모델 T’를 목격한다. 그의 인생 향방을 결정짓는 일대 사건이 됐다. 그는 자동차에 매력을 느껴 철공소에서 자동차 수리업을 겸한 아버지 곁에서 꿈을 키웠다. 이후 1922년 자동차 잡지에 난 구인 광고를 보고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의 자동차 정비업소 ‘아트 상회’로 들어간 혼다는 기다림 끝에 정식 정비공으로 일하게 됐다. 아트 상회에 입사한 지 6년 만인 1928년, 그의 나이 22세 때엔 고향으로 돌아와 '아트 상회 하마마츠 지점'을 열었다. 혼다의 뛰어난 정비 기술로 사업은 번창했다. 3년 만에는 종업원 50명을 거느린 하마마츠 최대 규모의 정비 공장으로 성장했다.

그는 사업에서 마련한 자금으로 자동차 경주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경주 중 큰 사고를 당해 18개월 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고, 결국 선수의 꿈을 접고 엔지니어의 길을 걸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끝없는 열정으로 도전…'車 왕국' 건설한 발명왕
혼다 소이치로는 1937년 '동해정기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피스톤링을 제작했다. 대량 생산에 어려움을 겪자 그 동안 정비공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피스톤링 제작에 쏟아 붓는 한편 ‘요코하마고등공업전문학교’(현 시즈오카대학 공학부)에 청강생으로 입학해 금속가공의 기초를 배웠다. 이후 혼다는 노력 끝에 피스톤링 대량생산에 성공하고 도요타자동차 등에 납품을 하게 됐다. 태평양 전쟁 후 동해정기를 도요타에 매각한 후 1946년 10월 내연기관 제작을 목표로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혼다기술연구소다. 오늘날 혼다자동차의 원류라 할 수 있다.

혼다는 차를 만들고 싶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고가의 자동차를 살 사람은 없었다. 당시 그는 전쟁 중 군대에서 사용하던 통신기용 소형 엔진이 대량 남아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를 자전거에 얹어 사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배기음을 그대로 본 따 '바타바타'라는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혼다 모터사이클의 시초다.

바타바타 엔진의 성공에 힘입어 1948년 9월 혼다기술연구소를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경영은 동업자였던 후지사와 타케오에게 맡기고 기술 개발에만 전념했다. 1958년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링 모터사이클인 ‘슈퍼커브 C100’을 내놓았다. 이 차량은 57년 동안 총 8000만대 가까이 팔렸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끝없는 열정으로 도전…'車 왕국' 건설한 발명왕
4년 뒤인 1962년 자동차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다른 이들은 ‘뒤늦은 출발’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혼다의 첫 자동차 S360, S500 등 S 시리즈는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수했다. 1964년에는 일본 브랜드 중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경주인 포뮬러원(F1)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아시아권 자동차 제조사로는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창업 후 30년 동안 회사를 이끌어 온 혼다 소이치로 회장은 공기로 엔진의 열을 식히는 공랭식 엔진 예찬론자였다. 하지만 세계 자동차 기술 흐름은 물로 공기를 식혀 효율성과 내구성을 높인 수냉식 엔진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그는 1973년 은퇴를 선언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퇴임식에서 그가 한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나는 많은 꿈을 이루었지만, 실패도 많았다. 그러나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실패로 인해 지금의 혼다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