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봉, 100㎏ 책 보따리 메고…고전 번역 '새로운 봉' 오르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삼국지연의' 모종강본 첫 완역 박기봉 비봉출판사 대표
35년 '출판쟁이'의 고집
중국어 원문 4권 등 총 12권 3년간 두문불출하며 '대작업'
금융맨 일하다 책의 매력에 빠져 장인집 담보로 출판사 세워
경제 전문 출판사, 절판의 아픔
교재 채택료 안줘 교수들에 '미운털'…책값 낮춰 학생 부담은 덜어줬지
35년 '출판쟁이'의 고집
중국어 원문 4권 등 총 12권 3년간 두문불출하며 '대작업'
금융맨 일하다 책의 매력에 빠져 장인집 담보로 출판사 세워
경제 전문 출판사, 절판의 아픔
교재 채택료 안줘 교수들에 '미운털'…책값 낮춰 학생 부담은 덜어줬지
(문)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가운데 정사(正史)는 무엇이고 허구는 무엇인가?
답을 맞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경제학 서적 출판 명가(名家)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대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모종강본 삼국(지)연의를 완역해 내놨다. 그동안 국내 어느 학자도 하지 못한 대작업으로 박 대표는 3년간 두문불출하며 이 작업에 매달렸다. 이번 삼국연의는 총 12권(8권, 중국어 원문 4권)짜리다. 전편을 120회로 나눠 회당 모종강의 평을 붙였으며, 사건마다 곁들여진 재치 있는 협평(간평)과 독삼국지법 등 원본 전체를 완역했다. 박 대표는 “모종강본을 충실하게 해석한 번역본으로 더 이상의 삼국연의는 없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 은행, 증권사를 거쳐 여러 사업에 몸담았던 그는 1980년 이후 35년간 ‘출판 외길’을 걸어왔다. 경제학을 좀 공부했다면 누구나 봤을 ‘경제수학 입문(A C Chiang)’, 1990년대 대학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오렌지색 표지 ‘자본론(K Marx)’ 등이 완역서 히트작이다. 그는 출판계에서 ‘알아주는 고집쟁이’로 통한다. 나쁜 고집이 아니라 지독하리만큼 순수한 신념이다. 충무공 이순신전서, 조선상고사 등 이번에 펴낸 삼국연의 못잖은 역작이 수두룩하다. 그의 삶의 좌우명은 ‘내성불구 부하우하구(內省不구 夫何憂何懼·마음을 살펴 부끄러움이 없으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서 그를 만나 ‘원조 대쪽’같이 살아온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사회 초년 시절 배운 리더의 조건
서울대 경제학과 66학번인 박 대표는 조순 전 서울시장의 제자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 동기다. 박 대표는 1970년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농협이 당시 5~6년차 직원들과 대학 졸업생을 상대로 동시에 시험을 치러 간부급 사원을 뽑았는데 그는 약 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1974년 송탄지점장으로 부임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거의 모든 부하직원이 중·고교 자녀를 둔 학부모였어요. 새파란 놈이 지점장으로 왔으니 말을 듣겠습니까. 술자리에서 취한 척하며 야지(빈정거린다는 일본말)놓는 것은 예삿일이고, 아무튼 전혀 통솔이 안 됐어요.”
직원들이 달라진 것은 그가 ‘특별한 실험’을 하고 나서다. 당시 눈먼 돈처럼 쓰이던 지점장 판공비를 전액 내놓는 등 비용 절감에 앞장섰다. 그리고 분기마다 절감한 비용을 모아 직원들에게 특별보너스를 지급했다. 직급, 근속연수, 부양가족으로 가산점을 매겨 직원들 보너스 지급 순위를 유리처럼 투명하게 했다. 본인은 끝에서 두 번째였다. “그 뒤 회식을 했더니 그렇게 툴툴거리던 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술을 따라줬어요. 이후 직원들이 일을 알아서 해 신경 쓸 일이 없었어요. 그때 느꼈습니다. 사심을 버리고, 돈 갖고 추접하게 굴지 않으면서 베푸는 것 하나만 해도 리더의 자질은 충분하다는 걸. 그래서 사회 지도층, 있는 인간들이 더 욕심부리는 모습을 보면 보기 참 딱합니다.” 지점 주변 땅이 헐값일 때 ‘땅을 사들이라’는 주변 조언이 쏟아질 때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증권사에서 깨달은 책의 위대함
1975년 말 삼보증권(대우증권 전신) 조사·정보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출근 첫날 벽에 부딪혔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 은행맨이 왔다고 사장은 기대를 한껏 하고 아침 조회부터 치켜세웠는데, 객장에 나가 보니 용어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정말 부끄럽고 큰일났다 싶었어요.” 명동 서점을 뒤져 증권 관련 책을 한 무더기 사 그날부터 퇴근 후 새벽까지 독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경험’을 했다고 회상했다.
“백지가 물감을 빨아들이듯, 정말 다급한 마음에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게 그렇게 짜릿할 줄 몰랐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공부한 적이 없었거든요.” 두 달이 지나니 회사 중역회의 참석이 가능해졌고, 네 달 지나니 사내 누구와도 논쟁이 가능할 만큼 지식이 쌓였다. 여섯 달 지나면서는 고객 대상 증권교실을 만들어 투자 강의에 나섰고, 신문 기고도 했다. 모든 것이 ‘책의 힘’이었다. “책의 힘이 정말 엄청나구나.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 리더들이 책을 열심히 읽어 지력을 갖추면 노동생산성이 올라가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평생 하기로 그때 결심했어요.” 박 대표는 1976년 말 미련없이 사표를 던져 1년간의 짧았던, 그러나 인생을 바꿔놓은 증권맨 생활을 접었다.
출판업은 하늘의 계시
출판사를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 했기에 사업에 나섰다. 장인 집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밑천을 꾸려 전자부품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수율이 안 나와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다음엔 인맥을 살려 종합상사 일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모 납품을 통해 사업가로서 간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업이 길어질수록 가슴 한쪽에 ‘출판사 설립’의 조바심은 더 커져갔다. 마침 노동현장 위장취업 때문에 공안 수사의 고초를 겪고 나온 친한 대학 친구를 “너 이제 갈 데 없다. 나랑 같이 일하자”고 설득해 출판사 설립에 나섰다. 1980년 5월23일자로 ‘비봉(比峰)출판사’를 세웠다. “다음날 신군부가 출판 금지령을 내렸어요. 막차를 탄 건데, 사업은 꼬였어도 하늘이 출판사 일은 하라고 그렇게 허락했나 봅니다.” 책을 엮는 데(比) 꼭대기(峰)가 되겠다는 신념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스승인 조순 전 서울시장은 이 작명에 감탄을 금치 않았다고 한다.
절판의 아픔…고전 번역은 계속할 것
의욕적으로 출판사를 차렸지만 적자가 계속돼 이번에는 박 대표 집을 은행에 담보로 맡겼다. 그러나 ‘이제야 맞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편했다고 했다.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것은 6년이 지나서다. 그동안 영어 원서로만 읽던 ‘경제수학 입문’을 번역하자 날개돋친 듯 팔렸다. 이 밖에도 여러 경제학 서적을 내며 ‘경제학 교과서는 비봉’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대쪽 정서에 어긋나는 현실이 출판사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교수들이 교재 채택의 대가로 관행적으로 요구하던 채택료 때문이다.
“하루는 한 교수가 지방에서 올라오더니 ‘왜 교재를 선택해줬는데 성의를 안 보이느냐’고 하는 겁니다. 아니, 그쪽에서 고마워해야지 왜 내가 채택료를 줍니까.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난 채택료 일절 안 주는 대신 책값을 항상 다른 출판사보다 20% 싸게 매겼어요. 학생들 부담 줄여주려고. ‘비봉은 책을 잘 만드는데 장사를 할 줄 모른다’는 조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직원들도 나서 ‘고집 좀 꺾으라’고 아우성이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수년간 고심 끝에 2000년 경제학 관련 ‘교재’ 전면 절판 선언을 했다. ‘내성불구’, 그다운 결정이었다.
박 대표는 “교수라는 직함을 건 가짜 지성이 너무 많다”며 “아이들이 한자만 제대로 공부해도 과외가 필요 없을 만큼 지력이 높아진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고전을 접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도원결의·연환계…가슴 뛰는 장면 모두 허구예요”
한나라 멸망 이후를 다룬 진수(陳壽)의 삼국지는 위서, 촉서, 오서로 구분돼 기전체(인물 중심 서술 방식)로 쓰인 정사(正史)다. 반면 삼국(지)연의는 정사를 기반으로 쓴 엄연한 ‘소설’이다. 현재 유통되는 판본은 모두 17세기께 청나라 모종강이 쓴 것이다. 14세기께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연의의 ‘원조’ 나관중본은 지금은 찾기 힘들다. “일제시대 때 요시가와 에이지가 쓴 자의적인 삼국연의 평역 ‘삼국지’가 큰 인기를 끌었어요. 광복 이후 여러 작가가 너도나도 모방해 펴내는 통에 유독 우리나라에서 ‘삼국연의’가 정사처럼 잘못 인식돼 왔습니다.” 도원결의, 연환계 등 대다수 유명한 장면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다. 단적으로 삼국연의의 매력 덩어리 제갈량은 정사에서는 ‘제갈량전’에 단출하게 서술돼 있을 뿐이다.
박기봉 대표는 중국 현지 서점에서 여러 판본의 모종강본을 구입해 일일이 비교 대조하며 원문을 완역했다. 중국에 다녀올 때 한 번에 들여오는 서적 무게는 무려 100㎏. 지나치리만큼 꼼꼼한 ‘완벽주의’ 성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작업이다. 너덜너덜해진 모종강본 중국 원서 각권에 그가 친 형광펜, 볼펜 선이 치열한 작업을 짐작케 했다. 한 부분만 봐도 그의 노고가 느껴진다. 주유의 대사 ‘대주당가 인생기하 비여조로 거일고다(對酒當歌 人生幾何 臂如朝露 去日苦多)’를 보면, 국내 A작가의 판에서는 ‘술잔 잡고 노래 부르니/인생은 그 얼마인고/아침이슬 아닐런가/지난 세월 고생도 많았지’로 돼 있다. 그러나 박 대표는 한자의 뜻을 정확히 짚어 ‘술잔 들고 노래할 때가/인생에 몇 번이나 있으랴/인생은 아침이슬 같다지만/지나온 날들 매우 많구나’로 번역했다. 원문의 뜻을 제대로 살린 것이다. 크게 인기를 끈 B작가의 판에 대해 그는 “원래 삼국연의하고는 많이 다른 흥미 위주의 제멋대로 평역서다. 사석에서 B작가 스스로 이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답) 삼국지는 正史, 삼국지연의는 허구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답을 맞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경제학 서적 출판 명가(名家)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대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모종강본 삼국(지)연의를 완역해 내놨다. 그동안 국내 어느 학자도 하지 못한 대작업으로 박 대표는 3년간 두문불출하며 이 작업에 매달렸다. 이번 삼국연의는 총 12권(8권, 중국어 원문 4권)짜리다. 전편을 120회로 나눠 회당 모종강의 평을 붙였으며, 사건마다 곁들여진 재치 있는 협평(간평)과 독삼국지법 등 원본 전체를 완역했다. 박 대표는 “모종강본을 충실하게 해석한 번역본으로 더 이상의 삼국연의는 없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 은행, 증권사를 거쳐 여러 사업에 몸담았던 그는 1980년 이후 35년간 ‘출판 외길’을 걸어왔다. 경제학을 좀 공부했다면 누구나 봤을 ‘경제수학 입문(A C Chiang)’, 1990년대 대학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오렌지색 표지 ‘자본론(K Marx)’ 등이 완역서 히트작이다. 그는 출판계에서 ‘알아주는 고집쟁이’로 통한다. 나쁜 고집이 아니라 지독하리만큼 순수한 신념이다. 충무공 이순신전서, 조선상고사 등 이번에 펴낸 삼국연의 못잖은 역작이 수두룩하다. 그의 삶의 좌우명은 ‘내성불구 부하우하구(內省不구 夫何憂何懼·마음을 살펴 부끄러움이 없으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서 그를 만나 ‘원조 대쪽’같이 살아온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사회 초년 시절 배운 리더의 조건
서울대 경제학과 66학번인 박 대표는 조순 전 서울시장의 제자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 동기다. 박 대표는 1970년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농협이 당시 5~6년차 직원들과 대학 졸업생을 상대로 동시에 시험을 치러 간부급 사원을 뽑았는데 그는 약 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1974년 송탄지점장으로 부임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거의 모든 부하직원이 중·고교 자녀를 둔 학부모였어요. 새파란 놈이 지점장으로 왔으니 말을 듣겠습니까. 술자리에서 취한 척하며 야지(빈정거린다는 일본말)놓는 것은 예삿일이고, 아무튼 전혀 통솔이 안 됐어요.”
직원들이 달라진 것은 그가 ‘특별한 실험’을 하고 나서다. 당시 눈먼 돈처럼 쓰이던 지점장 판공비를 전액 내놓는 등 비용 절감에 앞장섰다. 그리고 분기마다 절감한 비용을 모아 직원들에게 특별보너스를 지급했다. 직급, 근속연수, 부양가족으로 가산점을 매겨 직원들 보너스 지급 순위를 유리처럼 투명하게 했다. 본인은 끝에서 두 번째였다. “그 뒤 회식을 했더니 그렇게 툴툴거리던 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술을 따라줬어요. 이후 직원들이 일을 알아서 해 신경 쓸 일이 없었어요. 그때 느꼈습니다. 사심을 버리고, 돈 갖고 추접하게 굴지 않으면서 베푸는 것 하나만 해도 리더의 자질은 충분하다는 걸. 그래서 사회 지도층, 있는 인간들이 더 욕심부리는 모습을 보면 보기 참 딱합니다.” 지점 주변 땅이 헐값일 때 ‘땅을 사들이라’는 주변 조언이 쏟아질 때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증권사에서 깨달은 책의 위대함
1975년 말 삼보증권(대우증권 전신) 조사·정보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출근 첫날 벽에 부딪혔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 은행맨이 왔다고 사장은 기대를 한껏 하고 아침 조회부터 치켜세웠는데, 객장에 나가 보니 용어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정말 부끄럽고 큰일났다 싶었어요.” 명동 서점을 뒤져 증권 관련 책을 한 무더기 사 그날부터 퇴근 후 새벽까지 독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경험’을 했다고 회상했다.
“백지가 물감을 빨아들이듯, 정말 다급한 마음에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게 그렇게 짜릿할 줄 몰랐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공부한 적이 없었거든요.” 두 달이 지나니 회사 중역회의 참석이 가능해졌고, 네 달 지나니 사내 누구와도 논쟁이 가능할 만큼 지식이 쌓였다. 여섯 달 지나면서는 고객 대상 증권교실을 만들어 투자 강의에 나섰고, 신문 기고도 했다. 모든 것이 ‘책의 힘’이었다. “책의 힘이 정말 엄청나구나.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 리더들이 책을 열심히 읽어 지력을 갖추면 노동생산성이 올라가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평생 하기로 그때 결심했어요.” 박 대표는 1976년 말 미련없이 사표를 던져 1년간의 짧았던, 그러나 인생을 바꿔놓은 증권맨 생활을 접었다.
출판업은 하늘의 계시
출판사를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 했기에 사업에 나섰다. 장인 집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밑천을 꾸려 전자부품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수율이 안 나와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다음엔 인맥을 살려 종합상사 일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모 납품을 통해 사업가로서 간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업이 길어질수록 가슴 한쪽에 ‘출판사 설립’의 조바심은 더 커져갔다. 마침 노동현장 위장취업 때문에 공안 수사의 고초를 겪고 나온 친한 대학 친구를 “너 이제 갈 데 없다. 나랑 같이 일하자”고 설득해 출판사 설립에 나섰다. 1980년 5월23일자로 ‘비봉(比峰)출판사’를 세웠다. “다음날 신군부가 출판 금지령을 내렸어요. 막차를 탄 건데, 사업은 꼬였어도 하늘이 출판사 일은 하라고 그렇게 허락했나 봅니다.” 책을 엮는 데(比) 꼭대기(峰)가 되겠다는 신념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스승인 조순 전 서울시장은 이 작명에 감탄을 금치 않았다고 한다.
절판의 아픔…고전 번역은 계속할 것
의욕적으로 출판사를 차렸지만 적자가 계속돼 이번에는 박 대표 집을 은행에 담보로 맡겼다. 그러나 ‘이제야 맞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편했다고 했다.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것은 6년이 지나서다. 그동안 영어 원서로만 읽던 ‘경제수학 입문’을 번역하자 날개돋친 듯 팔렸다. 이 밖에도 여러 경제학 서적을 내며 ‘경제학 교과서는 비봉’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대쪽 정서에 어긋나는 현실이 출판사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교수들이 교재 채택의 대가로 관행적으로 요구하던 채택료 때문이다.
“하루는 한 교수가 지방에서 올라오더니 ‘왜 교재를 선택해줬는데 성의를 안 보이느냐’고 하는 겁니다. 아니, 그쪽에서 고마워해야지 왜 내가 채택료를 줍니까.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난 채택료 일절 안 주는 대신 책값을 항상 다른 출판사보다 20% 싸게 매겼어요. 학생들 부담 줄여주려고. ‘비봉은 책을 잘 만드는데 장사를 할 줄 모른다’는 조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직원들도 나서 ‘고집 좀 꺾으라’고 아우성이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수년간 고심 끝에 2000년 경제학 관련 ‘교재’ 전면 절판 선언을 했다. ‘내성불구’, 그다운 결정이었다.
박 대표는 “교수라는 직함을 건 가짜 지성이 너무 많다”며 “아이들이 한자만 제대로 공부해도 과외가 필요 없을 만큼 지력이 높아진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고전을 접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도원결의·연환계…가슴 뛰는 장면 모두 허구예요”
한나라 멸망 이후를 다룬 진수(陳壽)의 삼국지는 위서, 촉서, 오서로 구분돼 기전체(인물 중심 서술 방식)로 쓰인 정사(正史)다. 반면 삼국(지)연의는 정사를 기반으로 쓴 엄연한 ‘소설’이다. 현재 유통되는 판본은 모두 17세기께 청나라 모종강이 쓴 것이다. 14세기께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연의의 ‘원조’ 나관중본은 지금은 찾기 힘들다. “일제시대 때 요시가와 에이지가 쓴 자의적인 삼국연의 평역 ‘삼국지’가 큰 인기를 끌었어요. 광복 이후 여러 작가가 너도나도 모방해 펴내는 통에 유독 우리나라에서 ‘삼국연의’가 정사처럼 잘못 인식돼 왔습니다.” 도원결의, 연환계 등 대다수 유명한 장면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다. 단적으로 삼국연의의 매력 덩어리 제갈량은 정사에서는 ‘제갈량전’에 단출하게 서술돼 있을 뿐이다.
박기봉 대표는 중국 현지 서점에서 여러 판본의 모종강본을 구입해 일일이 비교 대조하며 원문을 완역했다. 중국에 다녀올 때 한 번에 들여오는 서적 무게는 무려 100㎏. 지나치리만큼 꼼꼼한 ‘완벽주의’ 성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작업이다. 너덜너덜해진 모종강본 중국 원서 각권에 그가 친 형광펜, 볼펜 선이 치열한 작업을 짐작케 했다. 한 부분만 봐도 그의 노고가 느껴진다. 주유의 대사 ‘대주당가 인생기하 비여조로 거일고다(對酒當歌 人生幾何 臂如朝露 去日苦多)’를 보면, 국내 A작가의 판에서는 ‘술잔 잡고 노래 부르니/인생은 그 얼마인고/아침이슬 아닐런가/지난 세월 고생도 많았지’로 돼 있다. 그러나 박 대표는 한자의 뜻을 정확히 짚어 ‘술잔 들고 노래할 때가/인생에 몇 번이나 있으랴/인생은 아침이슬 같다지만/지나온 날들 매우 많구나’로 번역했다. 원문의 뜻을 제대로 살린 것이다. 크게 인기를 끈 B작가의 판에 대해 그는 “원래 삼국연의하고는 많이 다른 흥미 위주의 제멋대로 평역서다. 사석에서 B작가 스스로 이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답) 삼국지는 正史, 삼국지연의는 허구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