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법원에서 또 패소했다. 잘못 징수한 과징금에다 환급이자와 소송비용까지 수천억원을 내놔야 할 처지가 됐다. 좌충우돌 난폭 행정으로 기업경영을 옥죄고 나랏살림까지 구멍나게 만든 셈이다.

어제 대법원에서 패소한 정유회사 징계건을 보면 공정위는 핵심 정책까지 한계에 봉착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공정위는 2000년 SK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가 주유소 유치경쟁을 제한키로 합의했다는 담합혐의를 들이댔다. 2011년 5월부터 3개 SK 계열사에만 1356억원을 매기는 등 총 40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가 도입한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제도)에 따라 정유사 간 담합이 있었다고 밝힌 정유업계 직원의 진술이 근거였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에 이어 대법원까지 객관적 증거가 부족할뿐더러 당시 업계가 담합할 상황도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과거 과도한 주유소 유치 경쟁으로 손실을 경험했던 정유사들 사이에 별도 담합 없이도 자연스럽게 경쟁을 자제하는 관행이 형성됐을 수 있다”고 대법은 판단한 것이다.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다.

과징금은 돌려받게 됐다지만 수천억 송사에 들어간 기업의 물적, 심적 경영 피해는 보상받을 길이 없다. 리니언시만 해도 그렇다. 은밀한 담합을 밝혀내기 위해 비록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운용이 이렇게 마구잡이 식이라면 차제에 재검토가 필요하다. 기업활동 전부를 잠재적인 범죄 목록으로 보는 공정위 특유의 접근법이 문제다. 사법(私法)의 영역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까지 공법(公法)으로 응징하겠다는 시각이 문제인 것이다. 툭하면 천문학적 과징금이 남발되니 변호사들이 공정위로 몰린다는 법조계 일각의 비아냥도 과한 우려가 아니다. 그렇게 몇 년의 공정위 경력이면 곧바로 로펌으로 가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먹이사슬이다. 공정위가 일거리를 양산해준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남양유업에 부과한 124억원의 과징금 중 119억원을 취소하라는 서울고법 판결이 불과 열흘 전 일이다. 2013년 우리사회에서 유난스런 갑질 논란을 유발했던 ‘남양유업 구매 강제’ 사건 때 공정위는 완장처럼 나서 고액의 과징금을 때렸고 국회는 남양유업방지법까지 발의했다. 하지만 여론에 편승해 한 회사의 존망을 흔든 국가의 갑질로 결정나고 말았다. 소주업체, 라면업계, 건설업계 등도 행정지도에 따랐다가 공정위의 철권을 맞았다. 최근 10년간 공정위의 과징금 처분 중 87%가 행정소송으로 이어진 것을 비롯해 지난해 서울고법의 과징금 소송 중 공정위 패소가 40% 가깝다는 통계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나.

담합은 물론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맹목적·교조적 행정은 권력의 존립기반조차 흔들고 만다. 경제민주화법이 차례차례 만들어지면서 공정거래법은 종전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의 권한을 쥐게 됐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공정위가 철퇴를 남용하지 않도록 쇠줄로 묶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