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욕하고 감옥 보내고…바닥난 '기업가 정신'
대우 쌍용 기아 동아건설 한라 한보 동양 한일 고합 진로 해태 삼미 우성건설 극동건설 벽산…. 1995년 기준 30대 그룹 중 부도로 쓰러진 절반의 명단이다. 부도낸 기업주는 어김없이 옥고를 치렀다.

현대 삼성 LG SK 한진 한화 롯데 금호 두산 대림 동국제강 효성 코오롱 동부 대상…. 살아남은 그룹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비자금 사건으로 현대상선·현대자동차 2세 경영인이 차례로 옥살이를 했고 삼성도 특검법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SK 회장 형제는 실타래처럼 꼬인 사건에 휘말려 2년 가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한화에서 대상까지 줄줄이 옥살이 비극을 겪었다. 형제 불화까지 개입된 금호와 효성의 형사재판도 아슬아슬하다. 동부는 빚에 몰려 경영권 박탈 직전이다.

일부 시민단체 등 대기업 비판세력의 위세는 대단하다. 출자구조부터 사업영역까지 세차게 흔들어 댄다. 최근에는 유보이익을 쌓아 놓고도 투자하지 않는다고 들볶는다. 유보이익은 기간손익 계산과 처분 결과에 따라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수치다. 실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균형을 맞춘 숫자다. 회계를 모르는 법조인이 유보이익에 대해 압류를 청구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기업의 현금성 자산 보유는 마땅한 투자 기회를 찾지 못했거나 미래의 유동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이다. 국가의 외환보유액과 같은 성격이다. 이를 투기 목적 비업무용 부동산과 동일시하는 것은 난센스다. 현금을 모두 써버렸다가 부도에 몰리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비판세력이 치켜세웠던 신진그룹도 순탄치 않다. 윤석금 웅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법정구속은 면했다. 2심 재판에서 검찰은 1심이 무죄로 판단한 기업어음 사기혐의도 거세게 몰아붙인다. 팬택은 창업주가 운 좋게 손 떼고 떠났지만 부실 악화로 엉망이다. 안랩 창업주는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덕수 STX 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노조 간부를 비롯한 협력업체와 지역사회의 탄원서가 눈물겹다.

망하든 흥하든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고 형사법정에 우르르 끌려다니는 상황에서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발휘될 리 없다. 기업가가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결단하지 않으면 일자리는 줄어들고 청년실업 참상도 해결할 수 없다. 기업마다 채용 인원을 슬그머니 줄이는 상황에서 삼성과 SK의 지난해 수준 신규 채용 유지 방침은 복음(福音)처럼 들린다. 청년고용 대책으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는 왠지 타이밍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된다.

졸업생 낙인을 피하려는 고학년 휴학으로 대학마다 몸살이다. 청년의 좌절은 다방면으로 표출된다. ‘슈퍼스타 K6’에서 저음의 우울한 자작곡으로 20~30대 표를 끌어모은 청년이 우승했다. 우느라 앙코르 곡 한 소절도 못 부른 24세 청년을 보며 많은 시청자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지난 10월 발표된 한 지방지 신인문학상에 대한 전상국·오정희 작가의 심사평은 섬뜩하다. 본선에 오른 19편 청년작가 소설의 주제는 ‘흔들리는 불안한 삶, 누추하고 너절한 일상, 절망과 무력함, 가학적·자학적 쾌감’으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투자는 미래 수익을 위해 지금 돈을 투입하는 것이다. 미래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데 잘못되면 무조건 교도소행이라면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기업 관련 형사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기업주에게 모든 형사책임을 집중시키는 관행의 정당성을 따져봐야 한다. 기업의 내부통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불법행위 가담자 모두를 균형 있게 처벌하고 내부자의 불법행위 신고의무를 강화해야 한다. 배임죄 요건도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 회복 없이는 경제 부흥을 기대할 수 없다. 기업 투자 없이는 좋은 일자리도 없고 청년의 희망을 꽃피울 터전도 만들 수 없다. 기업가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합당한 대우가 경제발전의 전제조건임을 깊이 새겨야 한다.

이만우 < 고려대 교수·경영학 leemm@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