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조선을 여행했던 퍼시벌 로웰은 조선인들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자(망건) 쓰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자를 써야 실질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사회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의 모자를 ‘평생을 통해 붙어다니는 영원한 검은 후광’이라고 표현한 데서 ‘모자의 나라’ 조선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드러난다. 어느 정도 모자의 종류가 늘어날 수 있는지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는 곳이라고 언급한 대목은 재미있다. 로웰만이 아니다. 당시 조선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에게는 갓이나 망건 두건과 패랭이 감투 등 온갖 모자들이 득세한 사회가 마냥 신기했다. 프랑스 여행가 앙리 갈리는 조선의 모자가 4000종이라면서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들 외국인은 모자가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사람들의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여겼다. 갈리는 개인 명예의 아이콘이라고 표현했다. 모자가 자신을 규정하며 명령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 이도 있었다.

정작 로웰도 갈리도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들이 살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그야말로 모자의 황금시대였다. 성경(고린도전서)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오히려 먼저 착용한 모자는 17세기 귀족계급부터 확산돼 19세기 초에는 온갖 모양의 모자가 선보였다. 물론 중산층의 확산 및 도시의 발전과 무관치 않다. 19세기 중반 모자쓰기는 대유행을 했다. 중산모나 중절모를 쓴 군중의 사진은 지금도 쉽게 만날 수있다. 1929년 대공황 사진에서도 대부분 미국인은 모자를 쓰고 있다. 한국에선 한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사람들을 1960년대까지 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서 모자를 쓰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었다. 계급과 권위가 줄어든 탈권위사회로의 이행이라고 한다. 라벨이 붙은 티셔츠의 유행을 모자의 연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세계화의 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모자가 필요한 곳은 많다. 군대나 경찰 등 제복이 살아숨쉬는 곳에서 제모는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머리 보호와 보온이 필요한 사람들은 모자를 쓸 수밖에 없다. 권위보다 실용이 중시되는 시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상징이던 이각(二角)모자가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에게 188만4000유로에 낙찰됐다. 모자 경매가격으로는 역대 최고라고 한다. 이각모자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모자다. 이 모자도 검은색이다. 한국인의 모자사랑 DNA가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