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김장, 나눔의 문화
김장철이다. 아침 운동길인 홍제천변 자투리땅에 유치원생들이 심어놓은 무와 배추들이 탐스럽더니, 얼마 전부터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아이들의 가슴에 수확의 기쁨이 고운 추억으로 오랫동안 간직되기를 기대해본다. 본격적인 김장철을 맞아 농촌에서는 무와 배추 수확이 한창이다. 하지만 작황이 너무 좋은 탓에 값이 떨어져 농민들의 표정에 수심이 가득하단다. 부디 이번 김장 때는 우리 모두가 예년보다 조금씩 더 준비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예로부터 김장은 겨울을 대비한 중요한 행사였다. 김장 김치는 채소가 나지 않는 긴 겨울 동안의 소중한 영양 공급원이었던 셈이다. 특히 김장의 주재료 중 하나인 무는 어디서나 빨리 잘 자라고, 영양소가 풍부해 비상 식량으로도 활용됐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들이 흥미롭다. 제갈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할 때면 주둔지에 심어 식량으로 삼았다고 해서 ‘제갈채(諸葛菜)’라고 불렸는가 하면, 중국 후한 광무제 때 궁궐을 포위한 반란군에 맞서 궁녀들이 무를 먹으며 버텼다 해서 ‘수절채(守節菜)’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그래도 김장에서는 배추가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김장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배추를 나르고 어머니 잔심부름 하느라 분주하곤 했다. 삶은 돼지고기에 김치 양념을 듬뿍 올린 발간 배추쌈 한입의 정겨운 기억은 아직도 군침을 돌게 한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절인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며 수다를 떨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100~200포기씩 담그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한꺼번에 많이 담그는 집이 별로 없는 듯하다. 김장 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한국인에게 김장은 먹거리 준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설이나 추석 명절이 가족과 친지 중심의 전통 문화라고 한다면 김장은 이웃 간 품앗이로 서로의 힘을 보태고 결실을 나누는 이웃 사랑의 전통 문화다. 작년 12월 우리 김장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연말을 맞아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의 김장 행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춥고 시린 곳을 찾아 골고루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는 나눔의 문화가 더욱 활성화됐으면 한다. 금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농업인과 서민 그리고 중소기업인에게 사랑의 김장처럼 따뜻한 금융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리라 다짐해본다.

김주하 < 농협은행장 jhjudang@nonghyu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