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러브 레터
오래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본 그림이 생각난다. 우리에게는 ‘진주 귀고리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러브 레터’였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의자에서 악기를 연주하다 하녀로부터 편지를 건네받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하녀를 올려다 보는 눈길이 의미심장했다. 두 여인이 나누는 은밀한 눈빛만큼이나 편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연애편지엔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아는 애틋한 사연이 녹아 있다. 볼테르는 어린 연인에게 남자 옷을 보내며 남장차림으로 몰래 와 달라는 편지를 부쳤다. 발자크는 우크라이나의 백작부인과 사랑을 이어가며 밤새워 50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편지를 썼고, 아폴리네르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양으로 글자를 배열한 상형편지를 써 보냈다. ‘실존주의 여전사’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 중 미국 작가 넬슨 앨그렌과 주고받은 수백통의 편지 속에서 더없이 다정다감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뿜어냈다.

빅토르 위고가 출판사와 ‘?’와 ‘!’로 소통한 일화도 유명하지만 그가 연인에게 보낸 편지는 길고 길었다. 이웃집 소녀에게 빠져 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는 “왜 기쁨 말고는 이런 감정을 대신할 다른 말이 없을까”라며 사랑의 황홀함을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썼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달고 있다 내게 선물한 붉은 리본을 나와 함께 묻어달라’는 마지막 편지 때문에 실연한 청년들의 권총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진 일도 있었다. 이에 비해 양주동 선생의 사랑고백은 재치만점이었다. 온갖 미사여구의 러브 레터가 기숙사 사감에게 걸려 여대생에게 전해지지 않자 그는 사랑에 관한 성경구절을 뽑아 요한복음 몇장몇절 식의 암호 편지로 검열을 뚫었다고 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시인 이상(1910~1937)이 25세 때 짝사랑 여인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엊그제 발견됐다고 한다. 상대는 23세 이혼녀였던 작가 최정희. 나중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해 자매 소설가 김지원·채원을 낳은 그녀는 당시 최고 인기 작가였다.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거부당한 사랑의 아픔이 묻어난다. 하지만 더 아릿한 것은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는 표현이다.

아, 누가 청년은 단숨에 읽고, 장년은 천천히 읽고, 노년은 몇 번이고 읽는 게 연애편지라고 했던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