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서울 안국동의 사비나미술관이 요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3D프린팅과 예술’전 덕분이다. 지구촌 정보기술(IT) 시장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3D프린터가 미술에 어떻게 접목될지 또 예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가늠해볼 수 있는 전시다.

사비나미술관은 지난해 초부터 이 전시를 기획했다. 3D프린팅 기술이 국내에서는 아직 남 얘기처럼 들리던 때 우리 사회와 예술에 끼치게 될 영향력을 일찌감치 내다보고 기획한 전시다.

전시 아이디어는 이명옥 관장에게서 나왔다. 아트 콘텐츠 메이커로 통하는 그는 오래전부터 톡톡 튀는 전시를 기획해 미술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세상의 변화를 꿰뚫어 보려는 혼이 깃든 전시회들이다.

그는 1996년 인사동에 사비나갤러리를 설립해 기획전을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미술전시는 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거나 한 시대를 조망하는 전시가 대다수였는데 이 관장이 처음으로 개념 또는 테마 중심의 기획전 전문 갤러리를 표방하고 나섰다.

원래부터 전시기획자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 속에는 예술가가 되려는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분위기의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부모는 교육자가 되길 희망했지만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예술 쪽에 더 마음이 쏠렸다.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원치 않는 공부(성신여대 교육학과)를 하게 된 그는 마음을 잡지 못한 채 전공 공부 대신 미술과 음악에 탐닉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했다. 방송 일을 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남다른 기획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작가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결국 방송국 일을 접고 그림 공부에 매진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곧 자신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방황하던 그는 아트 컬렉션에 흥미를 느껴 유럽을 돌며 작품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전시를 기획할 기회를 얻게 됐는데 그는 자신이 전시기획에 남다른 눈썰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기획자로서의 삶의 출발점이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한국에는 전문 전시기획자가 없었습니다. 몇 차례 전시 기획으로 자신감이 붙어 1996년 관훈동에 기획전시 전문인 사비나갤러리를 열고 본격적으로 기획전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가 기획한 전시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인간의 해석’전, ‘키스’전, ‘밤의 풍경’전 등 하나같이 화제를 뿌렸다. 연일 신문 문화면의 톱을 장식했고 스폰서가 따라붙을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요즘 한창 붐이 일고 있는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시도한 전시도 선보였다.

때론 그의 이런 ‘튀는’ 시도들은 거센 역풍을 맞기도 했다. ‘이발소 그림’전 때는 순수미술 진영으로부터 “이상한 짓 한다”고 비판받았고,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전은 대중 영합적이라고 깎아내리는 지적도 들어야 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사비나갤러리 색깔을 세상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그의 참신한 기획력은 저술 작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팜므 파탈(2008)’을 비롯해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이야기’ ‘명화경제토크’ ‘크로싱’ 등 미술을 남들이 생각지 못한 주제로 접근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6년 동안의 기획전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이 관장은 2002년 갤러리를 미술관으로 전환했다. 갤러리라는 상업적 이미지를 벗고 기획전 중심의 공익을 표방한 미술관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제가 미술관 운영을 너무 우습게 봤어요. 소장품 구입비, 인건비, 건물 유지·보수비 등으로 연간 최소 2억~3억원의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미술관이 한 개인의 열정만으론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죠. 공공부문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곧 다른 미술관들도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술관법이라는 틀만 갖춰졌지 사립미술관에 대한 공공부문 지원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사립미술관들의 연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해 노준의 토탈미술관 관장 등 몇몇 선배와 함께 한국사립미술관협회를 창립한 이유다. 그는 노 초대 회장의 뒤를 이어 2011년부터 협회 리더가 됐다.

공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미술관은 돈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바꾸는 게 급선무였다. “국·공립 미술관은 국가 예산을 집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경직된 기획을 하지만 사립미술관은 재미있는 전시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소수의 대기업 미술관을 제외하고 1년에 수억원에 달하는 운영비를 10년 이상 감당할 만한 곳은 드물어요. 자신의 소장품을 사후에 기부해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미술관 설립자들의 선의를 사회가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말로만 떠들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미술관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다. 이를 위해 이 관장은 협회 차원의 다양한 공익사업을 추진했다. 국내 대표작가의 작품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가상미술관 구축 사업 코리안아티스트프로젝트(KAP)와 학교 및 지역미술관을 연계하는 교육프로그램이 그중 대표적인 예. 처음에는 귀찮은 일을 시킨다며 회원들 사이에 볼멘소리도 터져 나왔지만 그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덕분에 KAP는 짧은 시간에 해외 미술인들 사이에 한국 현대미술 정보 포털로 자리 잡았고 교육프로그램도 지역미술관의 적자를 메워주는 효자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과 열정, 사심 없는 일처리에 대해 사립미술관협회 회원들은 2013년 12월 열린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 회장 재추대로 화답했다.

이 관장의 이런 성공 뒤에는 항상 ‘소통’이라는 두 글자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전시의 잇단 성공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의 모범적인 운영은 그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소통의 힘이다. 그가 요즘 목표로 삼고 있는 뮤지엄 법인 설립 간소화 작업도 문화체육관광부와의 소통 노력을 통해 반드시 관철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타인과 공감하는 소통이야말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전시가 재미있어야 대중과 소통할 수 있잖아요. 어때요. ‘3D프린팅과 예술’전 재미있지 않나요.”

이명옥 회장 프로필

△1955년 출생 △성신여대 교육학과 △홍익대 미술대학원(예술기획 전공) △사비나미술관 관장(1996년~현재) △국민대 미술학부 겸임교수 △과학문화융합포럼 공동대표(2008년~현재) △한국공학한림원 문화기술융합위원회 위원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회장(2011년~현재)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