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미국식 기부
국감장이나 청문회에서 흔한 장면이 세무자료를 내놓으라는 호통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꼼짝도 않는다. ‘아, 의원님 그게…’ 겉으로는 쩔쩔매는 듯하지만 대개 쇼다. 국회의원 나리들 면이 서게끔 죄송한 척하지만 과세자료는 공개하지 않는다. 국회의 추궁이나 검찰 수사가 창(槍)이라면 국세청엔 정말 든든한 방패가 있다.

국세기본법 81조13항에는 ‘세무공무원은 국세의 부과·징수자료를 타인에게 제공·누설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돼 있다. 세무자료 공개청구 소송에선 법원도 비공개 쪽이다. 국가와 납세자의 신뢰관계는 그렇게 중요하다. 비밀유지 전통이 미국에서는 훨씬 오래됐다.

엊그제 ‘130억달러의 기부천사’라는 외신이 들어왔다. 20년간 베일에 가려진 3명의 기부자는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직장동료였다. 분야별로 다양한 포트폴리오 기부, 그들의 자선 펀드인 가브리엘 트러스트엔 자산이 97억달러(약 10조원)…. 극적인 얘기들이다. 미국 국세청(IRS) 자료로 이들의 신원이 드러났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기부자 발굴은 IRS에 기록된 가브리엘 트러스트와 인듀어런스 펀딩 트러스트의 추적으로 시작됐다. 2002년 설립됐으나 자금출처나 운영주체는 쉽게 드러나질 않았다. 거듭된 추적 끝에 관리자가 네바다와 와이오밍 기업이고, 이 기업은 델라웨어의 다른 기업이 관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중, 3중의 차단선은 그렇게 뚫렸다. IRS는 이 취재에 얼마나 협조했을까.

게이츠·포드·게티 재단에 이어 자산규모로 미국서 네 번째지만 이들은 철저히 스스로를 감춰왔다. 다른 기부자들과 다른 점이다. 뒤에서 희귀근육병인 헌팅턴병 치료연구에만 매년 1억달러를 냈다. 아시아에 에이즈병원을 세웠고 참전 군인도 지원해왔다.

미국의 기부문화는 잘 알려져 있다. 세계 일류가 된 숨은 저력이다. 기부 활성화를 기리는 사회적 분위기 못지않게 세제와 기업경영의 문화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령 손비처리는 기본이다. 기부금에도 세금을 매기는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공익형 기부재단에 대한 지배는 변형된 형태의 상속이라는 측면도 있을 테지만 미국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배움은 한으로 남는 것일까. 역경의 기부자들이 온갖 복지·공익재단 대신 대학으로 향하는 것도 한국적 기부의 모습이다. 그래도 요즘은 재능기부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져 지갑을 나누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도 줄었다. 전문화 사회에서는 자기 일에 어떤 하자도 내지 않는 것, 성실 납세가 최고의 기부이겠지만.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