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진전 없는데…" 케리, 美中 모종합의 시사
시리아 외교 '궁지'…우크라이나 사태 '눈치보기'


취임 1년을 갓 넘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요즘 '동네북' 신세다.

간판 어젠다로 내세운 현안들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자 이를 숨죽이고 지켜보던 언론과 전문가그룹이 가차없이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예외주의'를 과시하던 미국 외교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당면 외교현안을 풀어가는데 있어 영향력과 존재감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는 비판론이 커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리처드 코헨은 25일(현지시간)자 칼럼에서 "미국이 경찰관 역할은 커녕 규율반장 역할도 못한다"고 힐난했다.

분명한 원칙과 방향을 세우고 정교한 대응을 꾀하기 보다는 선정적인 '정치 어젠다'처럼 일단 판을 벌려보자는 식으로 정책을 추진하다가 '역풍'을 맞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잦은 실언과 함께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태도도 외교정책의 무게감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 "미·중, 서로 案 교환했다?" 성급한 합의 시사 = 이달 중순 아시아순방에 나선 케리 국무장관은 북핵 문제를 고리로 동북아 질서의 새틀짜기를 시도했다.

과거사 갈등을 빚는 한국과 일본을 다시 안보협력의 틀로 끌어들이고 중국과 손을 잡은 '소재'를 모색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케리 장관이 지난 14일 베이징에서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안을 교환했다.

수일간 대화를 계속하겠다"며 "귀국하는 대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밝힌 것은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발언이 나오자 미·중 양국이 북핵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모종의 접점을 마련한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졌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록 이렇다할 상황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국 류전민(劉振民) 부부장이 지난주부터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중재하고 있으나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다.

소식통들은 "미국과 북한간의 입장차가 워낙 커 진전이 어려운 상황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케리 장관의 말이 다소 앞선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북핵과 관련한 케리 장관의 '성급한 멘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에는 '북한이 비핵화할 경우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돼있다'고 발언했다가 뒤늦게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이번 아시아 순방을 통해 거듭 확인하려한 '아시아 중시' 전략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시리아, 러시아 말만 믿다 뒤통수" = 당초 아사드 정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군세력을 무력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케리 장관은 지난해 5월 평화회담 카드를 들고 나왔다.

러시아의 지원을 전제로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동의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협상에 나서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홉달 동안 진행된 시리아 평화회담은 이달 중순 아사드 정권이 과도정부 구성 자체에 반대하면서 결렬됐다.

미국과 손잡고 아사드 정권을 압박할 것으로 믿었던 러시아는 오히려 '방조자' 역할을 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23일자 사설에서 "지난 아홉달을 허송세월했고 그 사이에 무고한 민간인 수천명이 희생됐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시리아의 화학무기 폐기약속은 거의 이행되지 않고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패트릭 스미스는 한 언론에 "케리의 외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비판했다.

◇ 이란 핵협상도 '시간벌기'로 끝나나 = 이란과 P5+1(5개 유엔 상임이사국과 독일)은 지난달 20일 핵폐기 초기단계 조치를 담은 '공동행동 계획'에 합의한데 이어 한달 뒤인 지난 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핵폐기 합의 일정을 도출해냈다.

오는 7월20일까지 최종 합의를 이끌어낸다는데 양측이 뜻을 모았다.

그러나 과연 '진실의 순간'이 왔을 때 이란이 최종적인 핵 포기를 할 것이냐를 놓고는 회의론이 여전하다.

무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지난 5일 테헤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란이 주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기를 미국은 원하지만 그런 요구가 실현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란에 시간만 벌어주고 결국 협상이 실패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7월 미국의 주선으로 이뤄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간 평화협상도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 3개 정착촌에 주택 558개 가구를 추가로 건설하기로 하면서 평화협상이 다시금 교착국면에 놓인 것이다.

케리 장관은 조만간 제이컵 루 재무장관과 함께 친 이스라엘 로비단체인 미국이스라엘공공문제위원회(AIPAC)에서 연설할 예정이지만 '가시방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미국 언론들을 지적하고 있다.

◇ 우크라이나 사태 놓고는 '눈치보기 = 오바마 대통령과 존 케리 장관은 지난주 우크라이나 정부의 유혈진압 사태에 대해 "레드라인을 넘으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기고한 글에서 "누구도 이런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후 저격수를 동원해 시민을 사살했다"고 비판했다.

퍼거슨 교수는 이어 "세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를 걱정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미국의 소극적 외교"라고 지적했다.

야권으로 권력이 넘어간 지금 미국은 어정쩡하게 발을 담근 채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 내에서 적극개입론이 대두되면서 러시아의 군사개입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러시아의 협조관계가 깨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표정이다.

우크라이나 회생을 지원하고 시리아와 이란 등 당면한 외교현안을 해결하려면 러시아와의 협력적 관계가 그만큼 절실하다는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rh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