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한국은행의 비공개 국제회의에서 리디노미네이
[다산 칼럼]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오해와 진실
션을 포함한 화폐 액면체계 변경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이 또 한 번 이슈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논의를 위해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리디노미네이션은 기존 화폐단위를 변경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원화를 1000분의 1로 리디노미네이션한다면 현재의 1000원은 1원이 된다. 단순히 ‘0’들을 떼어낸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표시되는 재화와 서비스 가격의 단위만 바뀔 뿐이다. 재화와 서비스들의 상대가격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소득, 물가, 환율, 수출입 등 경제의 실질변수도 변화가 없다.

그러나 과거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둘러싼 주장들이 분분했다. 2002년 한은이 1000원을 1환으로 바꿔 달러와 1 대 1로 유지하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반대에 부딪혀 백지화됐고, 노무현 정부 초기에도 잠깐 언급됐다가 사라졌다.

이런 논란에서 잘못된 부분은 리디노미네이션을 정치·경제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화폐개혁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퇴장자금 양성화를 목적으로 예금의 지급정지, 신구화폐 교환의 제한, 보유자산에 대한 과세 등의 조치와 병행될 경우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주게 된다. 이런 화폐개혁은 재산권 행사를 크게 제한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재산 손실을 막기 위해 서둘러 예금을 인출하거나 재산 가치를 유지할 만한 재화를 구입해 놓으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예금 인출 및 인플레이션 등이 발생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이유는 단순한 리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바로 이런 조치들을 동반한 화폐개혁 때문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화폐개혁과 혼동하는 이유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리디노미네이션을 포함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화교들이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자금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장롱 속 자금이 예상보다 많지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오해만 불러일으켰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하경제 양성화를 공약했을 때 지하경제의 잠자는 돈을 끌어내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낳기도 했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를 억제한다는 주장이다. 단순한 화폐액면 조정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억제되지 않는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줄이는 재정개혁을 동반한 리디노미네이션일 경우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는 국가들이 재정지출을 줄임과 동시에 재정지출을 뒷받침했던 통화팽창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화폐개혁을 하는 경우다.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사람들이 화폐를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화폐수요가 감소하고 화폐의 유통속도가 빨라진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킨다. 그런 상태에 있는 국가에서 재정개혁을 동반한 화폐개혁을 실시하면 빨라졌던 화폐 유통속도가 감소하고 화폐수요가 증가해 인플레이션이 억제된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더라도 재정개혁을 수행하는 국가는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실패한다.

물론 순수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단위 축소에 따른 거래 편의 제고와 회계장부 기장 처리의 간편화라는 편익이 있다. 그러나 컴퓨터 시스템 변경, 현금처리 자동화기기 대체 및 변경에 따른 비용도 따른다. 따라서 우리가 리디노미네이션을 논의할 때 고려할 점은 비용과 편익이다. 비용보다 편익이 크다면 실시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서 다른 정치·경제적 목적을 병행할 경우에는 반드시 심각한 경제적 충격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안재욱 < 경희대 서울부총장 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