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용왕
[천자칼럼] 동해
은 신라인들에겐 정신적 지주요 마음의 고향이었다. 토끼와 거북이 설화에서 토끼가 찾아간 곳은 동해 용왕이 사는 용궁이요, 잡귀를 쫓는 처용(處容)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동해의 용이 돼 일본 해적들을 소탕하겠다고 했다. 그의 해중 무덤인 대왕암은 지금도 기도처로 유명하다. 석굴암 불상이 뚫어질듯 바라보는 것도 동해다.

통일신라시대에 국가적으로 지낸 바다 제사도 물론 동해 중심이었다. 남해 제사는 부산 동래에서, 북해 제사는 포항 흥해읍, 동해 제사는 삼척에서 지냈다. 이들 모두가 동해인 점에서 신라인들의 세계관이 읽힌다. 조선시대에 와서야 남해 제사는 전라도 나주로 옮기고 북해는 폐지된다. 일본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의 무덤을 조사하면 모두 동해 쪽으로 시신의 머리를 두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

동해를 처음 기록한 문헌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다. 부여가 기원전 59년 신의 계시를 받고 수도를 동해 가섭원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섭원은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엔 동해와 서해의 조석간만 차이를 두고 지식인들 간 벌였던 싸움도 있었다. 이른바 ‘동해무조석(東海無潮汐)’ 논쟁이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서해는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조수가 있는 반면 동해는 중국과 멀기 때문에 조수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 한백겸 같은 이는 동해에 조석이 없는 것은 남극과 북극을 왕래하는 기운이 남북으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조석이 미치지 않지만 서해는 막혀 있기 때문에 조수가 심하다고 했다. 이항복은 지기(地氣)가 충만하지 못한 동해에는 수기(水氣·물기운)도 흩어져 조수가 없다는 논리를 세웠다. 조석간만의 차가 달의 운행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18세기 이익 정약용 등 실학자들에 와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동해는 또 훌륭한 문학적 소재이기도 했다. 특히 동해를 찬양한 허목의 동해송과 정철의 관동별곡은 유명하다.

미국 버지니아주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를 일본해와 같이 병기하도록 의무화한 법안이 통과됐다. 뉴욕주에서도 이런 법안이 발의된다고 한다. 국내 민간단체들의 힘으로 세계지도에 병기된 건수가 1999년 3%이던 것이 현재 30%까지 증가하고 있다. 동해가 국제사회에 본격 쓰인 것은 일제시대인 1929년 국제수로기구에서 책을 내면서다. 한국인들의 민족적 정서와 정신적 뿌리가 깊이 깃들어 있는 바다가 바로 동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