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의 이슈 프리즘] 당신도 '다문화 가정' 후손입니다
영도 하씨, 구리 신씨, 안산 김씨, 동탄 이씨…. ‘귀화(歸化) 성씨’가 봇물 터지듯 늘고 있다. 부산 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하는 미국계 변호사 로버트 할리 씨는 ‘하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국적을 등록하면서 본관을 ‘영도 하씨’로 신고했다. 프로축구단 성남 일화의 골키퍼로 활약했던 러시아 출신 발레리 사리체프 씨는 현역 시절 자신의 별명이었던 ‘신의 손’을 한국이름으로 채택하면서 ‘구리 신씨’로 국적을 취득했다.

외국인이 귀화하면서 한국식으로 성(姓)과 본관을 새롭게 정하는 ‘창성창관(創姓創貫)’의 급속한 증가는 주시해야 할 현상이다. 귀화 외국인에 의한 창성창관은 2010년 이후 매년 7000건을 넘어서고 있다. 외국인의 귀화가 활발하지 않았던 1985년만 해도 국내의 성씨는 통틀어 275개에 불과했다(통계청 자료). 그랬던 성씨가 2000년에 728개로 늘어났고, 이제는 수만개로 급속하게 불어났다.

'그들'이 '우리'인 이유

1985년 당시에도 275개 성씨 가운데 절반에 육박하는 136개 성씨는 시조(始祖)가 귀화 외국인이었다. ‘다(多)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반도(半島)국가인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데 불가결한 지정학적 특징이었다. ‘해양왕’ 장보고가 맹위를 떨쳤던 삼국시대와 그 직전 시기 아랍에서 귀화한 처용(處容)을 비롯해 40여개 성씨가 외국에서 들어왔다. 조선시대 황희 정승을 비롯해 대한민국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 등 숱한 인재를 배출한 황씨(黃氏)의 시조 황락(黃洛)도 이때 중국 후한(後漢)에서 귀화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을 탄생시킨 ‘대한민국 10대 성씨’ 김해김씨와 허씨의 시조모(始祖母)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다.

여진, 거란, 몽골,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고려시대에는 60여개 성씨가 합류했다.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황해도 해안을 통해 귀화한 안남국 리씨 왕조의 마지막 왕자 리롱뜨엉(李龍祥)을 시조로 한 화산(花山)이씨는 요즘도 베트남에서 ‘왕실 가문’으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다문화 수혈'로 성장해 온 한국

조선 왕조 때는 24개 성씨가 ‘다문화 가정’을 창시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倭軍)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 들어왔다가 투항한 사야가(沙也可)를 시조로 하는 우록김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박정희 정부 시절 내무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치열 씨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사야가 장군의 13세손이었다.

동성동본과 근친 간의 결혼을 금지한 관행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수십대(代)를 이어가는 동안 무수한 피가 섞였다. 전체 성씨의 절반이 귀화성씨였던 한국에서 ‘이주 외국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국내 체류 외국인 150만명 시대를 맞으면서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포용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결혼이민자 자립 지원 강화와 다문화사회 정책 효율성 제고 등을 내걸었지만, ‘다문화 가정’을 보는 ‘텃새’ 한국인들의 인식 전환이 먼저다. 시간 범위(time span)의 문제일 뿐, 우리 모두가 ‘다문화 가정의 후손’임을 자각하는 게 이주 외국인 포용정책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이학영 편집국 국장대우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