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9주년 - 독주하는 국회권력] 고질병 '쪽지예산'
#1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2013년 예산안’ 심의 과정. 당초 정부안에 들어 있지 않던 안성농산물유통센터 건립 사업이 포함되면서 예산 6억원이 편성됐다. 금석천 생태하천 복원사업 예산은 2억원에서 46억원으로 23배나 늘었다. 이들 사업은 예산 심의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김학용 당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새누리당 간사 지역구인 경기 안성 지역의 민원 사업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치권에선 “전형적인 쪽지예산”이란 지적이 나왔다.

#2 민주당 실세들이 몰려 있는 경기 남양주는 올해 지역 예산이 대폭 늘었다. 고용센터 설치사업(30억원), 생태하천 복원사업(20억5000만원), 한우플라자 사업(20억원) 등이 새로 편성되거나 증액됐다. 남양주갑은 올해 예산 심의 당시 예결특위 야당 간사였던 최재성 의원, 남양주을은 박기춘 당시 원내대표 지역구다. 이한구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의 ‘수성의료지구 교통망체계 타당성 조사’ 예산도 당초 5억원에서 187억원으로 40배 가까이 늘었다.

여야 합의하면 예산 마음대로 요리…‘실세’ 들일수록 지역구예산 잘 챙겨


한국의 헌법은 정부가 예산 편성권을 갖고 국회는 예산을 심의·확정하는 권한만 부여하고 있다. 예산 편성부터 심의까지 의회가 전담하는 미국과는 다른 시스템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한국 국회는 사실상 예산안 전반에 대해 전권을 행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야만 합의하면 정부가 제출한 예산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어서다. 우선 예산 삭감은 국회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정부가 꼭 필요하다고 집어 넣은 사업도 국회가 ‘노’하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예산 증액은 정부가 동의를 해줘야 한다. 국회가 마음대로 예산을 늘리지 말라는 취지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국회가 ‘이 예산을 늘려주지 않으면 다른 예산을 깎겠다’고 나오면 정부로서도 두 손 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국회의원들이 예산 심의 막판에 지역구 민원을 끼워 넣는 ‘쪽지예산’은 국회 영향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로 예산 민원을 전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의원들의 요구에 따라 없던 지역구 예산이 생기기도 하고, 기존에 잡혀 있던 예산보다 몇 십 배 증액되기도 한다.

정부 관계자는 “당초 정부가 예산을 책정하지 않은 지역 사업은 그만큼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각 상임위원회에서 올라온 예산안을 최종 심의·확정하는 국회 예결특위 소속 의원들과 당 대표, 원내대표 등 이른바 실세 의원들일수록 지역구 예산을 더 잘 챙기는 경향이 있다. 예결특위 위원 중에서도 ‘계수조정소위’ 위원들은 사실상 마지막까지 예산 규모를 조정하기 때문에 본인들의 쪽지예산뿐 아니라 다른 의원들의 쪽지예산까지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계수조정소위가 ‘밀실 야합’이란 비판도 나온다. 여야는 매년 12월31일이 임박하면 취재진의 눈을 피해 국회 근처 호텔 등으로 자리를 옮겨 여야 예결특위 간사끼리 예산안을 비공개로 심의한다. 작년 말에도 여야 간사가 여의도 모 호텔에서 4조원 규모의 예산을 회의록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심사해 논란을 빚었다.

기자들 눈 피해 호텔방서 예산 심사…예결특위, 전문성보다 지역 안배


국가의 한 해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예결특위 위원들이 전문성이 아닌 ‘지역 안배’ 차원에서 결정될 때가 많은 것도 문제다. 예결특위 위원들의 임기는 1년으로 일반 상임위원 임기(2년)보다 짧다. 구성 인원도 50명으로 통상 20여명인 다른 상임위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의원 임기 4년간 되도록 많은 의원들이 돌아가며 예결특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다.

예결특위 관계자는 “만약 여당 지도부가 예결특위에 경남권 의원들을 한 명도 배치하지 않으면 ‘경남 홀대론’이 나오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의원들의 주먹구구식 예산 심의를 막으려면 예결특위를 일반 상임위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는 의원들이 다른 상임위원과 예결특위 위원을 동시에 맡고 있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예결특위를 일반 상임위로 바꾸면 의원들이 예산 심의에만 전력할 수 있고, 임기도 2년으로 길어져 매년 반복되는 ‘돌려먹기식’ 특위 구성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여야 어느 쪽에서도 예결특위를 상임위로 바꾸려는 움직임은 없다.

쪽지예산과 지역 안배를 나쁜 쪽으로만 봐선 안된다는 반론도 있다. 예결특위 관계자는 “수도권과 달리 지방의 경우 의원들이 이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예산을 거의 배정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산안을 볼모로 정치협상을 벌이는 태도도 도마에 오른다. 올해 예산안이 지난 1월1일 국회를 통과한 것은 민주당이 제주해군기지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예산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산과 전혀 관련없는 이슈 때문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겨 예산안을 처리하는 불명예를 기록한 것이다.

특별취재팀 손성태 차장, 김재후 이태훈 기자(이상 정치부), 주용석 차장대우, 런던·스톡홀름=김주완 기자(이상 경제부), 이태명 기자(산업부), 장진모 워싱턴 ·안재석 도쿄 특파원, 남윤선 기자(이상 국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