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홍기택 산은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장은 ‘낙하산’이다.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였지만, 하루아침에 국내 최대 정책금융기관 수장으로서 2000명 이상을 거느리게 됐으니 말이다. 내년엔 정책금융공사도 흡수합병해야 한다. ‘대통령의 조언자’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그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 시절의 해프닝, 낙하산 논란, STX팬오션 처리 과정에서의 잡음 등이 부각된 탓이다. 한데 정작 산업은행 직원들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업무 이해도가 굉장히 높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의외로 강단이 있다” 등 그를 만나본 직원들의 평가는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홍 회장이 맛있는 만남의 장소로 추천한 곳은 서울 반포의 삼계탕마을 2호점. 그의 자택(옛 반포아파트) 근처에 있는 평범한 아파트 상가 가게였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고 자리도 30석에 불과했다. “평소 즐겨 찾는다”며 활짝 웃는 모습에서 그의 소박한 취향이 묻어났다.

○“내년 은행 승진시험에 응시할 것”

[한경과 맛있는 만남] 홍기택 산은금융그룹 회장 "교수 때 생각, 현장 와보니 많이 바뀌더라"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금세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노릇노릇한 삼계탕을 날라왔다. 고소한 냄새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적당한 크기의 중닭이 배를 뒤집고 두 다리를 얌전히 모은 채 누워 있었다. 순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서실장을 대동한 그는 취임 넉 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의전이 번거롭다고 했다. “1984년부터 30년가량 교수로 살아온 ‘자유인’이었는데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는 것.

회장이 된 뒤 그는 열심히 공부 중이다. 산업은행 직원들을 두루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게 주된 방법이다. 지난달 초 휴가 때는 종로지점을 깜짝 방문해 직원들과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생일 등을 맞은 직원들에게 직접 전화해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진짜 공부도 한다. 홍 회장은 “은행 연수자료 23권을 사무실에 두고 보고 있다”며 “공부한 내용을 큰 화이트보드에 정리하고 실무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식인데, 내년에 4급(차·과장급) 시험을 보면 수석을 차지할 것 같다”고 농을 쳤다.

그는 은행에 와서 대규모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은행은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면 대폭 인사를 한다는데, 직원들을 잘 모르는 내가 인사를 하면 누군가가 대신 하는 인사일 것 같아서”라는 이유에서였다.

○첫사랑과 42년째 해로


우러나온 닭 국물은 달리 간을 하지 않아도 구수했다. 부드럽고 쫄깃한 닭고기 다리와 도톰한 가슴살을 젓가락으로 헤집다가 종내 다리 하나는 손에 잡고 먹게 되는, 그런 맛이었다.

홍 회장은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한 서울 토박이다. “할아버지 대에 서울로 이사 와 아버지 세대부터 서울에서 살았다”고 한다. 홍 회장과 그의 아내 전성빈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학 때부터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다. 공부 잘하는 커플로 유명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공부는 처가 더 잘했다. 대학도 수석으로 들어가고, 경기여고도 우등으로 졸업했다. 나는 경기고에서 키(184㎝)는 가장 컸지만 우등생은 아니었다”며 살짝 웃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처음으로 사귄 사람이었다. 1971년 대학 1학년 1학기 때 만나 42년째 일생을 함께하는 중이다.

그는 취임 초인 지난 4월 말 한 인터뷰에서 “나는 낙하산이 맞다, 결과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가 ‘낙하산’으로 분류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전자공학과 70학번)과 서강대 동문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 홍 회장을 산은금융그룹 회장에 임명했다. 더디기만 한 다른 공기업 인사와는 대조적으로 빨랐다.

대학생 때부터 박 대통령과 알던 사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물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까만 지프를 타고 와 정문에서 내렸다. 경호원도 있었다. 누군가 다가가 말을 걸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매일 데모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친해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부인께서 더 친했다는 말도 있다”고 물었다. 그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에게 직접 물어봤더니, 지금까지 말 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가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였다. 그때 도운 인연으로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등과 공부모임에 참석했다. 대선 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론과 현실 다르다는 것 느껴”

이야기는 막 물이 올라가는데, 뚝배기 그릇에 담긴 삼계탕은 벌써 반쯤 줄었다. 식탁 한가운데 놓인 스테인리스 통에는 닭뼈가 수북이 쌓였다.

교수 생활과 금융그룹 회장 생활 사이에는 의전 말고도 많은 간극이 있을 법했다. 홍 회장은 “이론과 현실이 다르긴 다르더라”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디테일이 아니라 일반화된 것을 보는데, 여기선 디테일을 본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내가 일반화했던 이론이 현실의 디테일과 다른 것도 있다”며 대표적 사례로 산은지주 자회사인 대우증권을 꼽았다. “학자 때는 왜 산은지주가 대우증권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퇴직임원 자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기 와서 보니 그 반대다. 오히려 대우증권이 산업은행 도움을 많이 받고 있더라.” 그는 “그래도 논문 쓸 때보다는 머리를 덜 쓰는 것 같다”며 웃었다.

애로사항도 털어놨다. 그는 “올라오는 보고서를 내가 검증할 방법이 제한돼 있다”며 “논리적인지, 상식적인지를 판단할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늘 조심스럽다”고 했다. “매일 아침 회장 노릇하러 가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뚝배기 바닥에 깔려 있던 찹쌀을 슬슬 국물에 풀어 먹기 시작했다. 삼계탕 국물이 배어들어 짭짤하니 식감이 좋았다. 찹쌀 한 숟가락에 큼직한 깍두기를 얹어 먹으니 맛이 그만이었다.

정부는 최근 정책금융기관 체계 개편 방안을 발표하면서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 산은금융지주를 내년 7월부터 합치겠다고 했다. 정부가 디테일을 짰지만 홍 회장 본인이 인수위원 시절부터 검토했던 사안이다.

홍 회장은 산업은행을 민영화해 글로벌 투자은행(IB)으로 키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100% 동감한다”고 했다. “다만 시기가 문제”라고 덧붙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자 시절 민영화를 주장하던 것과 180도 다른 주장이다.

생각이 바뀐 이유를 물을 때쯤 한 참석자의 숟가락이 뚝배기 바닥을 닥닥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인근 맥주집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걸어가며 그는 “산업은행 민영화를 계속 추진하면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STX팬오션, 사려는 곳 많을 것”

홍 회장은 취임 후 넉 달간 STX그룹 구조조정 등 기업 구조조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지만 그의 기업 구조조정 원칙은 확고했다. 교수 출신답게 논리도 정연했고 근거로 대는 수치도 구체적이었다.

STX팬오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STX팬오션 인수를 거부해 여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홍 회장은 “실사 결과 인수가 불가능하다고 나왔는데, 그냥 덮고 가자는 주장이 있었다”며 “하지만 그런 주장은 투명하고 신뢰받는 정부, 즉 ‘정부 3.0’을 제시한 이번 정부의 국정철학과 맞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TX팬오션의 법정관리가 회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산업은행은 최근 2000억원을 이 회사에 지원했다. 홍 회장은 “STX팬오션을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만들겠다”며 “장기용선 부실을 털어냈으니 재무제표가 크게 개선될 것이고, 내년 법정관리를 졸업하면 사려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남의 빚을 다 떠안아주는 게 정책금융기관이 할 일은 아니다. 이해당사자들이 손실 분담을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처럼 우리도 은행 대신 정부나 공공기관이 직접 기업 구조조정을 해야 할 것이다.” 7개월 전만 해도 대학 교수였던 그는 이미 확고한 구조조정 철학을 가진 정책금융기관 CEO가 돼 있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홍기택 산은금융그룹 회장 "교수 때 생각, 현장 와보니 많이 바뀌더라"

홍기택 회장의 단골집 반포 삼계탕마을 2호점

찹쌀을 뚝배기 바닥에 깔아 국물 걸쭉 … 훈제 오리고기도 일품

[한경과 맛있는 만남] 홍기택 산은금융그룹 회장 "교수 때 생각, 현장 와보니 많이 바뀌더라"
서울 서초구에 3개 지점을 갖고 있는 삼계탕마을은 3대째 오로지 삼계탕 한 가지만 팔아온 삼계탕 전문점이다. 서울 반포동에 1, 2호점이 있고 서초동 남부터미널 인근에 3호점이 있다.


서초점에서는 훈제 오리고기도 판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에겐 선택할 메뉴가 없다는 게 단점이다.

찹쌀을 닭의 배에 넣지 않고 뚝배기 바닥에 깔아 국물이 걸쭉한 것이 특징이다. 인삼주가 한 잔씩 딸려 나온다.

삼계탕 한 그릇에 1만5000원. 2000원을 더 내고 공기밥을 말아 먹을 수도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