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여름의 찬란한 빛 속에서
긴 장마 끝나니 연일 불볕더위가 이어진다. 몇 십 년 만의 폭염, 열대야, 최대치에 이른 전기사용량과 블랙아웃(대정전) 위기, 피서 인파, 무더위에 쓰러지는 노인들. 날마다 쏟아지는 이 여름 뉴스들이 즐겁지가 않다. 말복이 지났어도 이 한낮 땡볕의 기세는 누그러들지 않는다. 목덜미에 닿는 햇볕은 마치 촛농이 떨어진 듯 따갑다. 햇볕이 정수리에 닿을 때, 정수리를 뚫는 열과 빛 때문에 뇌수는 흐물흐물 녹는 듯하다. 이 직사광선 아래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찜통더위에 지쳐 목마름을 풀어줄 찬물을 찾고, 더위를 피할 그늘만을 찾는다. 더위에 널브러진 육체의 사고와 판단 정지, 무기력, 헐떡거림 말고 더 생생한 것은 없다. 더위로 한껏 달궈진 도심을 등지고 표표히 떠나 숲과 바다를 찾은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사람들이 폭염과 싸우는 동안, 한여름의 대지에 축복처럼 쏟아지는 풍부한 일조량, 그 열기와 빛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만물의 알맹이들은 살찌고 있다. 과일들은 이 땡볕을 자양분처럼 받아들이며 과육을 더하고 단맛을 품으며 무르익는다. 땡볕 속에서 익어가는 과일들은 온갖 고난을 견디며 성숙하는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 혹서(酷暑)에 우리가 한 일이란 무엇인가? 서늘하고 쾌적한 그늘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백색의 빛들이 넘실대는 바깥으로 감히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어둑한 실내에서 인터넷 뉴스나 검색했다. 저녁에는 슈퍼마켓에서 사온 수박 몇 통을 식구들과 함께 깨먹고, 에어컨으로 식힌 실내에서 책 두어 권을 읽었을 뿐이다. 오, 여름 내내 땀방울을 뚝뚝 흘리는 보람찬 노동은 꿈조차 꾸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름이 주는 한 줌의 감미로운 행복조차 누릴 염치가 없다.

여름의 절정에서 읽은 한 시인의 시구가 천둥 번개처럼 내 몸에 꽂히듯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자, 가자꾸나! 그 어두운 곳에 틀어박혀 있지 마라!”라는 시구는 마치 나를 겨냥한 듯하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감탄하며, 정신을 차린다. 덥다고 일손을 아예 놓아버린 채 마냥 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금세 닥칠 연말에 나와야 할 책들, 혹은 내년까지 끝내야 될 책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뭔가를 끊임없이 도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시인 휘트먼은 삶에의 초대에 응하려는 자는 먼저 “강한 피와 근육과 인내력”이 필요하다고 쓴다. 그랬으니 “용기와 강건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 고난의 길로 들어설 수 없으리./이미 자신의 최선의 것을 다 탕진한 자는 이곳에 올 수 없으리./오직 아름답고 강인한 몸뚱어리를 지닌 자만이 올 수 있으니”(휘트먼, ‘노래하라, 더 드넓은 길을’)라고 단호하게 썼겠지. 제 체온보다 낮은 기온에도 죽을 듯이 허덕이는 자들은 이 축제에 참여할 자리가 없다. 영혼을 분출하는 자만이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이 거친 삶의 길을 갈 수 있으리. 이 삶의 길에서 기쁨으로 충만하고, 보람과 열매들을 거머쥐는 자들만이 행복할 수 있으리!

한낮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가고, 가로수에 달라붙은 매미들은 한가롭게 울어댄다. 곧 다가올 처서(處暑)가 지나면 매미 울음소리도 잦아들겠지. 넘치는 이 여름의 찬란한 빛줄기, 열기를 내뿜던 보도(步道)들, 도서관의 열람실을 꽉 채운 사람들, 밤하늘의 별무리, 쩍쩍 갈라지던 붉은 수박들, 어두운 수풀 위에서 반짝이던 반딧불이들도 여름과 함께 다 지나가겠지. 포도나무의 열매들은 무르익고, 젊은 연인들은 부부가 되고, 요람에 잠든 아기들은 자라나 청년이 되겠지. 모든 것들은 빠르게 지나간다. 지나간 것들은 그리워지는 법. 시간은 되풀이하지 않고 단 한 번으로 끝날 것이기에. 지나간 것들은 우리 기억의 깊은 곳에서 아득한 추억으로 새겨진다. 이 여름을 보람되게 보낸 사람은 먼 뒷날 한 시인과 같이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싱싱한 빛이여!”(보들레르)라고 아득함에 젖어 추억하리라.

곡식과 열매들이 익어가는 여름은 찬란하고 위대하다. 여름 과일들이 제 속을 채우며 익어가듯 우리의 미래, 자유, 사랑, 위엄도 이 여름 속에서 무르익고 있으니!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