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변화' VS '시청자 권리 제한'

최근 연예인이 TV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을 맡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연기가 유명 스타의 차지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이와 반대로 과거 인기가 높았던 성우 더빙 버전의 외화들은 이제 지상파 방송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는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등장한 외화 더빙 개그에 성우들이 반발하면서 엄용수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이 사과하기도 했다.

전문 성우의 입지가 좁아지는 가운데 최근의 변화가 시청자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늘어나는 연예인 더빙·자막방송 = 지난달 방송된 MBC 예능 '진짜 사나이'의 내레이션은 가수 겸 배우 손담비가 맡았다.

이어진 방송에는 그룹 시크릿의 한선화가 목소리를 보탰다.

지난달 방송된 MBC의 간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휴먼다큐 사랑'에는 배우 최지우, 김남주, 유해진, 고창석 등 유명 배우들이 내레이션을 책임졌다.

KBS가 야심 차게 선보인 다큐멘터리 'KBS 파노라마'의 2부작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내레이션은 영화배우 정진영이었고, SBS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희망TV SBS'에는 배우 구혜선과 유인나가 목소리로 '재능 기부'를 했다.

영화관에서 개그맨이나 배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제 익숙하다.

올해 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드래곤 헌터'는 개그맨 김기리, '더 자이언트'는 김준현·정범균·김지민이 각각 더빙을 맡았다.

BBC 다큐멘터리 '원라이프'는 개그맨 이수근과 배우 김유정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예능 PD는 "최근에는 단지 내용 전달 능력을 따지기보다는 유명 배우 개개인의 개성이 잘 알려진 측면을 활용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며 "시청자의 감정 이입을 쉽게 끌어내고, 프로그램 콘셉트를 잘 전달하고자 연예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최근 지상파 방송사의 더빙판 외화도 큰 폭으로 줄었다.

최근 KBS가 인기 외화 '셜록 2'를 자막 형식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종편은 현재 더빙 외화 프로그램 자체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성우협회 이근욱 이사장은 "그동안 더빙이 활용된 영역에는 외화와 라디오드라마가 있는데 과거에 비하면 분량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지상파 방송사나 정부 기관이 운영하는 채널조차 버젓이 자막 방송을 내보내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불가피' VS '시청자 권리 제한' = 연예인의 내레이션 참여와 자막방송 증가는 결국 시청률 경쟁의 격화와 제작비 부담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한 중견 PD는 "연기자에게 내레이션을 맡기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며 "제작진으로서는 프로그램 자체를 종합적인 측면에서 더 효과적으로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할 뿐 '성우냐 연기자냐'는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외화는 더빙보다 자막으로 방송하면 제작비가 상당히 절감된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자막을 선택하는 측면이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막 방송의 증가는 국민의 시청권을 제한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장애인 등 시청 소외계층을 위해서 적어도 지상파 방송사는 더빙에 적극적으로 나설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또 연예인의 단발성 더빙 참여가 장기적으로는 콘텐츠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분석도 있다.

앞서 성우 정재헌 씨는 개그콘서트 논란과 관련 게재한 글에서 "설렁설렁 와서 더빙하고 어마어마한 연기료를 홍보의 대가로 받아가서는 '마치 진짜 성우같은 연기를 펼쳤다'며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성우로서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억누르기 힘든 화가 날 때도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최소한 다양한 국민이 시청하는 공중파 방송에서는 시청자가 자막과 더빙 중 원하는 것,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해 볼 수 있도록 더빙이 필수화돼야 하는데도 방송 외화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근욱 이사장은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성우가 있는 것처럼 이제 성우도 영역을 나누지 말고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인기만 있으면 무조건 된다는 생각에 발음이나 목소리 연기 능력이 부족한 연예인에게 더빙을 맡기는 경향은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자막방송을 원하는 시청자도 있고 제작비 부담도 있겠지만 우리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인이나 장애인 등 시청 소외계층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더빙 방송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hapyr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