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乙'을 위한 정치
광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매년 수조원 이상의 이익을 내고 1400%의 유보금을 광에 쌓아두는 일부 재벌 대기업은 아무래도 인심과는 상관없어 보인다. 일감 몰아주기, 골목상권 몰아내기, 단가 후려치기, 비정규직 마구 쓰기, 하청업체 막 대하기, 목표량 밀어내기, 화학사고 감추기 등 광만 넓히는 ‘갑’의 횡포 목록이 점점 길어지니 말이다. 게다가 공정시장이나 사고근절 입법이라도 논의할라치면 “국회에 반기업 정서가 심각하다” “과징금 한 번으로 기업이 망한다” “입법 때문에 중소기업이 더 어려워진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여야 합의 입법조차도 슬그머니 완화되기 일쑤다.

이 와중에 현대제철 하청업체 노동자 5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문득 2008년 1월 이천 냉동창고 화재가 떠오른다. 당시 하청업체 노동자 40여명의 질식사를 알리는 뉴스속보에서 원청업체는 거두절미 “책임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원청이 2000만원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난 당시 대형참사 이후에도 위험을 하청 ‘을’에게 떠넘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행태를 뿌리 뽑지 못한 탓에 올해만 벌써 화학물질 사고가 20건이 넘었다.

이에 항의하는 ‘을’이 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청년의 주휴수당 5억원을 가로챈 모 커피전문점이 고발당했고, 모 대기업은 고교 실습생의 밀린 시간외 수당 5억원을 내놓았다. 프랜차이즈 점주들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청년유니온도 법적 노조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 9일 의원실에 찾아온 CJ대한통운 택배기사들은 건당 수수료 880원을 800원으로 낮추려는 대기업의 횡포 앞에 여전히 가슴을 친다. 잘살겠다 모인 것이 아니라 배고파 못살겠어서 처음으로 항의를 시작한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수십원의 수수료라도 알뜰하게 짜내어 수조원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재벌 대기업의 경영방침일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에 살아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햇볕에 그을린 깡마른 택배기사들의 얼굴 위로 한국의 무수한 ‘을’의 얼굴이 겹친다.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하며 뒷북이라도 쳐야 소리가 난다. ‘을’을 위한 정치가 너무 늦어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까지 잃는 현실 앞에서 너무 늦었다는 반성도 사치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도 ‘을’을 위한 정치와 ‘을’을 위한 행동이 시급하다.

은수미 민주당 국회의원 hopesumi@n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