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끝나지 않은 '소버린 트라우마'
“상속세 절세방법은 없나요?” 세금 전공인 필자가 특강초청을 받으면 단골로 등장하는 질문이다. 강의 끝날 때 비책을 공개하겠다고 예고하면 분위기는 고조된다. 상속세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죽지 않으면 된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죽지 않으면 상속세 납세의무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금 피하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상속세가 먼저 달려온다. 자녀가 주식을 확보하기 전에 기업을 남겨 놓고 죽으면 상속세 때문에 경영권을 잃기 십상이다. 경영권을 지키더라도 지분은 쪼그라든다. 상속 이후 경영에 실패하면 패가망신이고 성공해도 이익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붙어 다닌다.

작고한 부친을 이어 청년시절부터 그룹경영을 맡았던 최태원 회장은 SK그룹을 재계순위 3등으로 끌어올렸으나 행로는 험난했다. 최 회장의 시련은 SK글로벌 사태가 시발점이다. 수출실적 부풀리기와 리베이트로 엉망이던 종합무역상사에서 회계담당 임직원 모두가 가담해 장기간 끌어온 분식회계 책임을 업무파악 중이던 물리학과 출신 최 회장이 뒤집어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주가하락을 틈타 14.99%의 지분을 매집한 소버린이 들이닥쳤다. 가까운 지인도 소버린 추천 사외이사 후보로 나서는 배신을 맛봐야 했다. 임직원이 단결해 주주를 찾아다니며 위임장을 모아 겨우 방어했다. 감사위원 선임에는 ‘3% 의결권 제한(3% 넘는 주식을 가진 주주의 경우 3% 초과지분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이 적용되는데 소버린은 펀드를 쪼개 의결권을 모두 행사했으나 최 회장 측은 제한에 걸려 못 쓴 지분이 많았다.

임원들은 업무를 제쳐놓고 해외펀드 주주를 ‘알현’하러 세계를 떠돌았다. 일부 펀드는 지원을 빌미로 이권을 요구했다.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는 우선주 매입소각을 압박했고 SK가 이를 실행하자 격려서한까지 보냈다. 기업공시를 연구하던 필자는 SK 공시에서 헤르메스 서한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영문편지와 국문번역이 포함된 임의공시에는 억울함에 대한 호소가 숨어 있었다.

SK 우선주는 보통주보다 1% 추가배당하는 무의결권주다. 액면가 5000원에 대해 매년 50원을 추가배당하는 대신 의결권이 없다. 주가가 10만원이 넘는 상황이라 주당 50원 추가배당은 영양가가 없었고 의결권이 없기 때문에 우선주 가치는 크게 떨어져 보통주의 40% 수준으로 거래됐다. SK가 압력에 굴복해 소각 목적으로 우선주 매입에 나서자 가격이 폭등해 보통주의 90%까지 치솟았다. 의결권 없는 주식은 5% 이상 취득해도 보고의무가 없기 때문에 매집주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선주의 외국인 지분율이 50% 이상 증가한 사실로 보아 해외펀드가 미리 매집해 놓고 SK를 압박한 것이 확실했다.

회사에 막대한 손해가 귀착되는 자해적 매입소각으로 해외펀드는 대박을 터뜨렸고 기쁜 마음에 격려서한까지 보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런 정황을 일간지 칼럼을 통해 공개했고 일부 신문의 후속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금융당국은 침묵했고 검찰도 부동자세였다. 대기업에는 가혹했던 감시자들이 해외펀드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돌부처였다.

소버린은 2005년에는 LG(주)와 LG전자 주식을 7%씩 매집했다. 의결권 3% 제한이 적용되는 감사위원 선임에서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LG그룹을 공략하면 묶이는 의결권이 많아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LG그룹 자본력이 두려웠던지 손해를 감수하며 금방 처분해 SK주식 매각대금과 함께 챙겨 떠났다.

취약한 대주주 지분이 초래한 소버린 사태는 SK의 트라우마다. 아프다는 소문이 돌면 온갖 민간요법이 몰려오듯이 비극 재발방지책을 들고 찾아온 방문객이 많았을 것이다. 파생상품 투자를 부추기며 그룹펀드 운영에 임의로 개입하던 인사가 문제가 노출되자 해외로 잠적했고 최 회장 형제의 책임을 추궁하는 형사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SK는 우리 경제의 오랜 숙제였던 하이닉스를 인수해 만년 적자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선제적 투자가 생사를 가르는 반도체 사업의 막대한 자본조달에는 대주주 역할이 절대적이다. SK가 소버린 트라우마를 떨치고 글로벌 초우량 기업으로 도약할 활로를 찾기 바란다.

이만우 < 고려대 교수·경영학 객원논설위원 leemm@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