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유신체제에서 내려진 긴급조치들이 무더기로 위헌 판정을 받았다.

헌법재판소는 21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긴급조치 9호)는 모두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재판관 8명이 모두 위헌으로 판단했고 반대 견해는 없었다.

1974~1975년 발동된 긴급조치 1·2·9호는 거의 40년 만에 위헌 판정을 받았다. 헌재 결정은 2010년 2월 헌법소원이 제기된 지 3년여 만에 내려졌다.

청구인 오모씨는 1974년 버스에 동석한 여고생에게 정부시책 비판 발언을 한 혐의(긴급조치 위반)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징역 3년을 받았고 재심 도중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자 2010년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긴급조치 1·2호에 대해 “입법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고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참정권,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신체의 자유,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침해한다”고 밝혔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해서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헌법개정 주체인 국민의 주권행사를 제한한 것으로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 부정·반대·왜곡·비방행위를 금지했으며 2호는 긴급조치를 위반한 자를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았다. 긴급조치 9호는 집회·시위, 신문·방송 등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사전 허가 건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시위를 불허했다.

헌재는 다만 긴급조치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 53조는 심판 대상에서 제외했다. 유신헌법 53조는 긴급조치 발령의 근거규정일 뿐 심판 청구인의 재판에 직접 적용된 규정이 아니고 청구인들의 의사도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유신헌법 53조는 천재·지변, 중대한 재정·경제 위기이거나 국가 안보 등이 중대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을 때 대통령에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