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사로잡으려 점점 자극의 정도 세져"
"장르 다양화 통해 극성 강화 흐름 벗어나야"

##초등학생 소녀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십수 년 그를 피해 숨어 살던 소녀는 어른이 돼 다시 마주친 그 '짐승'에게 칼을 꽂고 만다.

그리고 죽은 '짐승'을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웅덩이에 파묻어버린다.

이 여자는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자기가 낳은 딸과 자신에게 헌신했던 남자를 가차없이 버린다.

(SBS '야왕')
##쌍둥이 형은 주먹깨나 쓰는 '일진'이다.

그런데 똑같은 얼굴의 동생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형은 동생을 때린 가해자를 손봐주러 나섰다가 우발적으로 가해자가 옥상에서 추락사하면서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형이 감옥에 가자 엄마는 동생을 방치한 채 마약중독에 빠졌다가 사망한다.

(KBS '시리우스')
##중학생 소녀의 아버지는 살인자로 알려진 '인간 쓰레기'다.

이로 인해 왕따를 당하던 소녀는 난생처음 생긴 친구가 납치돼가는 것을 보고 쫓아갔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도망치다 이번에는 차에 치인다.

(MBC '보고싶다')
##외동아들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치는 시어머니는 '마마보이' 남편에 질려 이혼하려는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처넣는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떼밀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하고, 머리채까지 뜯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불륜으로 몰아가는 계략도 꾸민다.

(MBC '백년의 유산')



안방극장이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비극과 불행, 불운의 끝을 달린다.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주인공을 내몰며 긴장감을 높인다.

방송가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각박해지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항변하는가 하면 점점 TV에서 이탈해가는 시청자를 잡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변명한다.

◇안방극장은 '복수 공화국'인가 = 현재 안방극장에서는 '복수'가 넘쳐난다.

지난해 명품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았던 SBS '추적자' 역시 복수가 코드였고 '송중기 신드롬'을 낳았던 KBS '착한남자'도 복수에 몸을 던진 남자의 이야기였다.

연말에 막을 내린 MBC '메이퀸'과 SBS '다섯손가락'은 복수를 내세운 '막장 드라마'의 대명사였다.

최근 종영한 MBC '보고싶다'에는 복수심에 사이코패스가 돼버린 캐릭터까지 등장했고, 현재 방송 중인 SBS '야왕'은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복수극이다.

주부들을 공략하는 아침연속극과 저녁 일일극은 아예 복수 없이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게 된지 오래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심리학자, 평론가들은 경제적 위기에 따른 대한민국의 '분노 게이지' 상승이 그 이유라는 해석을 앞다퉈 내놓았다.

사는 게 각박하고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정의가 상실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드라마에서도 분노, 복수의 심리를 극대화한 이야기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섯손가락'에서 악녀 채영랑을 연기했던 채시라는 "그런 행동들은 인간 채시라로서는 도저히 못할 짓이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세상에는 채영랑 같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는 말로 '다섯손가락'의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갈수록 자극적인 설정 이어져 = SBS '야왕'은 2-4회가 19세 관람가로 방송됐다.

비록 심야시간으로 분류되는 밤 10시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상파 방송 드라마가 19세 관람가로 방송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1회는 15세 관람가로 방송했던 '야왕'은 살인, 시체유기에 이어 호스트바 풍경이 집중적으로 조명되면서 2-4회를 19세 관람가로 방송하기에 이르렀다.

시청등급은 방송사가 자체적으로 매기는 것인데, SBS가 봤을 때도 이야기의 극성이 너무 세 도저히 15세 관람가로는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녀에 대한 성폭행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고, 성공을 위해 어린 딸과 남편을 가차없이 버린 여자가 등장하며, 학교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고 마약중독자까지 등장시키는 드라마가 이어지면서 마치 안방극장은 '누가누가 더 자극적인가'를 경쟁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KBS미디어 정해룡 드라마본부장은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드라마의 자극의 정도가 점점 세지고 있다"며 "극성이 점점 강해지면서 후발주자는 더욱 강한 것을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정 본부장은 "소재가 다양화되지 않으면서 극성만 강해져 비극적인 이야기의 강도도 점점 세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르 다양화, 작품성으로 보완해야" = 절대 부와 권력의 온갖 만행을 적나라하게 그린 '추적자' 역시 자극성의 강도로 보면 최고점을 찍었다.

하지만 '추적자'는 '명품 드라마'로 남는다.

왜일까.

'추적자'의 히어로인 손현주는 "'추적자'는 현실을 그대로 들고 와 그대로 벗겨놓았다.

간만에 보는 정상적인, 현실적인 내용의 드라마"라고 해석했다.

극성을 위한 극성이 아니라, 극적인 설정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장치로만 썼을 뿐 이후에는 이야기와 캐릭터, 개연성의 힘으로 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청자는 '추적자'를 보고 '선정적이다'고 하지 않고 '현실적이다'고 극찬했다.

일요일 밤 11시45분에 방송되면서도 최근 화제를 몰고온 KBS 드라마스페셜 4부작 '시리우스'도 자극적인 설정에서 출발하지만 꽉찬 이야기와 또렷하고 섬세한 캐릭터 플레이로 완성도를 칭찬받고 있다.

기막힌 비극에서 출발했고 살벌한 마약범죄의 세계를 자극적으로 그리지만 드라마는 그 안에 쌍둥이 형제의 뒤바뀐 운명에 따른 슬픔을 묵직하게 그려내고 빠르고 스타일리시한 전개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정해룡 본부장은 "결국은 장르의 다양화를 통해 디테일의 재미를 살리는 것이 극성으로 치닫는 흐름에서 탈피하는 방법"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응답하라 1997'이 극단적인 이야기 하나 없이 소재의 재미로 디테일을 살려 차별화를 이룬 것처럼 소재와 장르가 다양화되면 자극적인 설정에 기댈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타입슬립'을 소재로 한 판타지 퓨전 사극을 포함해 최근 사극 붐이 이는 것 역시 이 같은 선정적인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
방송 관계자들은 선정적인 설정도 시청자가 피로감을 느끼는 순간 외면당하기 때문에 그것에만 기대는 기획은 지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