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화가 유선태 씨(62)의 그림 ‘말과 글’은 책과 책장, 확성기, 사람들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림 속에 조그맣게 등장한 자전거는 디지털 시대 상상력의 유목(nomad)처럼 보인다.

유씨를 비롯한 탄탄한 화력의 국내 작가 그림을 압축해 제작한 뮤라섹(mulasec) 기법의 이색 판화 작품을 마치 빵가게에서 빵을 고르듯 구입할 수 있는 아트 마트가 열린다. 21일부터 내달 8일까지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펼쳐지는 ‘설 선물 그림, 프린트 베이커리’전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박항률 주태석 정일 하태임 두민 강영민 강석문 권수현 아트놈 박형진 김현아 홍지연 찰스장 송형노 씨 등 중견·신진 작가 25명의 뮤라섹 판화 30여점이 걸린다.

뮤라섹 판화는 종이를 재료로 하는 기존 판화와 달리 화가의 그림을 피그먼트 안료를 사용해 압축한 다음 아크릴 액자로 만든 아트 상품. 추억의 옛 사진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아크릴과 알루미늄패널 사이에 넣고 압축해 코팅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질감이 섬세하고, 색감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게 특징. 참여 작가들이 직접 고유번호(에디션)를 붙이고 사인도 했다.

미술품을 소장하고 즐기는 것이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작품값을 3호(27.3×22㎝)는 9만원, 10호(53×45.5㎝)는 18만원으로 책정했다. 비싼 가격 때문에 작품 소장을 망설였던 컬렉터들이 설을 앞두고 소액으로 작품을 사 가족 친구 연인에게 선물하거나 집안을 꾸밀 수 있는 기회다.

출품작들은 예쁜 구상화부터 팝아트, 추상화, 한국화 등 현대미술의 프리즘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꽃밭에서 슬픈 표정 짓는 토끼, 을지로의 새벽 풍경, 현란한 색띠 등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시적 감수성으로 그려낸 작품이 많다.

박항률 화백(63)의 그림 ‘꽃그늘’은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성을 화폭에 옮긴 것이다. 등산길에 이름 모를 꽃을 보고 멈춰섰을 때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흰색의 마술사’로 불리는 정일 씨의 ‘나의 방에서’도 뮤라섹 판화로 관람객을 맞는다. 피아노와 새장, 화병으로 예쁘게 꾸민 방을 조근조근 설명하듯 풀어 놓은 작품이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처럼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한다.

‘극사실주의 대가’ 주태석 씨의 ‘자연 이미지’ 시리즈도 걸린다. 나무를 클로즈업시켜 세밀하게 묘사하는 반면 배경인 숲의 이미지는 과감하게 무시해 빛과 그림자의 조화를 실감나게 응축해낸 게 독특하다. 색띠들로 밝고 경쾌한 에너지를 전달하는 하태임 씨(39)의 ‘한 토막(Un passage)’은 감춰진 색채와 드러낸 색채가 만들어내는 조화를 녹여낸 작품이다. 노랑, 하양, 연두 등 원색들이 어우러져 깊이를 더한다.

새해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권수현 씨의 ‘백만장자’도 나온다. 왕국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성채를 배경으로 코끼리가 등장한 이 작품은 알록달록하고 불규칙한 모자이크 패턴 작업을 통해 긍정의 에너지를 표출한다.

새벽녘 도심에 빛이 퍼져나가는 순간을 마술처럼 잡아낸 김성호 씨의 ‘새벽 을지로’, 두 마리 공작새가 춤추는 모습을 잡아낸 홍지연 씨의 오방색 한국화, 주사위를 사실적으로 그린 두민 씨의 그림, 붉은 강아지가 참새와 새싹을 바라보고 있는 박형진 씨의 작품, 토끼를 통해 인간의 순수함과 동심을 표현한 정성원 씨의 팝아트에서는 작가 특유의 재치와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학준 서울옥션 대표는 “미술을 좋아하지만 선뜻 작품을 구입하기 쉽지 않은 일반인이 빵가게에서 빵을 고르듯 그림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프린트 베이커리’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02)360-411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