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 처벌 땐 경제 위축 논리 설득력 상실할 듯

범죄에 연루된 경영인을 처벌하면 기업 경영이 되레 개선된다는 연구 결과는 정치권의 `재벌 봐주기' 근절 노력에 큰 힘을 보탤 것으로 기대된다.

재벌 총수들이 횡령이나 배임 등 각종 비리로 수사를 받을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 `경제위축론'이 설 자리를 잃게 됐기 때문이다.

김두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7일 한국국제경제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공개한 `경영범죄와 기업성과: 경영자의 배임과 횡령 범죄가 기업성과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대검찰청의 의뢰를 받아 작성됐다.

대검이 이런 성격의 연구 용역을 의뢰한 것은 역대 처음이다.

재벌 총수 수사 때마다 반복된 재계의 `역풍'에 대비하려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대검 중수부는 2003년 11월 사법 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대선자금 수사에서 정경유착의 실상을 들춰내 여야 중견 정치인들과 대통령 최측근 인사들을 대거 구속하는 성과를 거뒀다.

불법 대선자금에는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등 한화, 롯데,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재벌 기업이 대부분이 연루됐으나 처벌 강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자금 제공 사실을 실토한 점이 참작됐지만, 기업인들을 격리하면 국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재계의 반발도 고려된 듯하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비자금 조성 및 경영권 편법승계 비리를 수사했을 당시에는 현대차 공장이 있는 충남 아산시 등 지방자치단체장까지 나서 정 회장 구명운동에 나섰다.

검찰 수사로 기업 이미지 실추, 신인도 하락, 경영 공백 등으로 현대자동차의 성장동력이 상실해 국가와 아산지역 경제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여론이 약발을 받은 듯 정 회장은 구속된 지 1년 만에 열린 항소심에서 사회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선고를 받아 교도소 문을 나설 수 있었다.

항소심 판결을 놓고 재벌총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법적 책임과 국가 경제 공헌도를 고려한 균형잡힌 판단이라는 긍정론도 만만찮았다.

기업인의 범죄는 단죄해야 마땅하지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차단해야 한다는 논리가 우호적인 여론 형성에 주효했다.

그러나 김두얼 연구위원이 분석한 결과로는 재계 등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기업인 처벌 불가론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연구는 검찰 전산자료와 판결문 자료를 활용해 분석했다.

그동안 대검에서 대외비로 분류됐다가 이번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분석 대상은 2004년 1심 판결이 이뤄진 경영범죄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경영범죄 921건을 전부 조사하고 업무상 배임ㆍ횡령, 조세범처벌법 및 증권거래법 위반사례 등은 표본 조사했다.

1심 재판이 종료된 특경가법 사건 가운데 경영범죄를 일으킨 기업은 128곳이다.

이들 기업의 자산총액을 보면 10억원 미만 기업이 70여개로 가장 많다.

100억~1천억원 30여곳, 1천억~1조원 10여곳, 1조원 이상 10곳 미만이다.

경영 범죄는 대기업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특경가법을 위반한 사례가 그동안 대기업 위주로 언론에 보도된 탓에 중소기업의 범죄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 기업의 경영자를 처벌한 이후 경영 실적을 분석한 것을 보면 의외의 현상이 나왔다.

이자ㆍ법인세차감전순이익(EBIT)은 경영자를 처벌했을 때 개선된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경영자를 처벌하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진다는 재계의 주장과 완전히 상반된 결과다.

연도별 실적을 보면 2001년 전체 기업의 평균 수익률이 -10~10%를 중심으로 정규분포에 가까웠다.

범죄 발생기업의 분포도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범죄가 들통나 재판이 시작된 2003년에는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범죄 발생 기업의 수익률이 크게 악화한 것이다.

수익률이 -10% 미만인 기업이 전체 기업에서 20%를 넘지 않았지만 범죄 발생 기업은 50%였다.

피해 규모가 회사 총자산보다 컸기 때문에 해당 기업의 성과 악화는 불가피했다.

이는 검찰 수사와 무관한 것이다.

수사와 재판이 종료된 2007년엔 범죄 기업의 평균 수익률이 일반 기업 수준으로 회복됐다.

경영 범죄로 회사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서 환부를 도려낸 덕에 회생할 수 있었다고 김 연구위원은 설명했다.

경영 범죄의 심각성과 피해 규모를 고려하면 실제 형량은 지나치게 낮았다.

1999년 이후 10대 재벌 총수 가운데 7명이 총 2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실형을 산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기업인 범죄자의 `솜방망이 처벌' 관행을 근절하자는 경제민주화 노력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 등에서 활발해진 이유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소속 의원 23명은 횡령ㆍ배임죄로 처벌받는 재벌 총수에게는 반드시 실형이 선고되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기업인의 횡령액이 5억∼50억원이면 징역 3년 이하,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인 형량을 300억원 이상은 무기 또는 15년 이상, 50억∼300억원은 10년 이상, 5억~50억원은 7년 이상으로 높인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재판부가 정상 참작을 이유로 법정 최저 형량의 절반으로 작량감경해도 집행유예 선고가 불가능하게 된다.

민주통합당은 경제범죄를 저지른 총수 일가에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금지하는 사면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clap@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