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안동 동래시장 오거리 큰길가에 있는 한정식집 ‘정림’. 가야금 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이곳에서 지난달 31일 허남식 부산시장(63)을 만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야생초와 약초들이 곳곳에서 내는 특유의 강한 향이 코를 자극해 갑자기 없던 힘이 불끈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만으로 음식맛을 내는 약선요리 전문가 정영숙 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한국전통음식 세계화에도 앞장서고 있는 이곳을 2004년부터 부산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3선의 허 시장이 인터뷰 장소로 정한 이유는 뭘까.

◆야생초로 맛내는 한식집, 소풀 먹이던 시절 기억나

허 시장이 ‘정림’을 찾은 지는 10년 정도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밥상에 질경이, 달맞이잎 등 들풀이 가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릴 적 고향 의령에서는 논 10마지기 정도 농사를 지어도 식구는 많고 먹을 것이 없어 세 끼 모두 먹지 못했죠. 배고파 친구들과 소풀 먹이면서 먹던 것이 참꽃이라고 불렀던 진달래와 야생초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보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집에서 산과 들에서 캔 온갖 약초들을 내놓고, 양념도 숙성시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후 단골이 됐죠.”

외국인들도 국제행사 때면 많이 찾는다. 허 시장은 이 집을 모범기업이라고 치켜세웠다. “한국적인 것이 국내에서 먹혀들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생겨나고, 일자리도 만들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지방자치단체의 숙원사업인 일자리도 만들고, 부산의 염원인 ‘세계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정림’이 허 시장에게는 무엇보다 대견스러운 것이다.

혼자 먹기에는 아까운 음식인데, 누구하고 오느냐고 물었다. 허 시장은 “아내와 함께 매년 서너 차례 온다”고 말했다. “취미가 일일 정도로 답답한 제게 아내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뒷바라지를 잘합니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가 코디 역할을 해주는 덕에 멋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죠. 시장이 되고 나서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어 늘 미안한데 이곳을 한번씩 찾으면서 면피하는 셈이죠. 제 애창곡이 ‘부산갈매기’였는데 최근 아내 이름과 같은 가수 이미자 씨의 ‘동백아가씨’를 배워 부르곤 합니다.”

◆그린벨트 개발, 공단 만드니 기업 돌아와

약초로 삶은 돼지고기 수육이 나오자 허 시장은 7년된 효소김치에 싸서 단숨에 입안으로 가져간다. 톡 쏘는 듯하면서도 구수한 보쌈 맛을 음미하던 허 시장은 “외국인들도 인터넷과 소문을 듣고는 이 집 수육을 많이 찾는다”고 또다시 음식점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국 제2 도시, 부산의 국제화가 만족스런 수준인지 궁금했다. 그는 “컨테이너 도시 부산이 문화와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힘주어 대답했다. 허 시장 별명은 ‘소리없는 불도저’다. 요란하게 떠벌이지 않으면서도 할 일은 다한다는 평가다.

실제 관광·컨벤션, 영화·영상, 금융, 원자력산업 등 허 시장이 추진 중인 10대 전략산업에 대한 부산시민들의 평가는 우호적이다. 부산영화제는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확실히 자리매김했고, 금융 허브 비전을 떠받쳐줄 한국거래소도 2005년부터 부산에 자리잡고 있다. 항만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국내 유일의 선박 검사기관인 한국선급이 지난 9월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해왔다.

부산시민들이 꼽는 허 시장의 치적 1호는 ‘일자리 창출’이다. 허 시장은 “녹산·신호·지사공단 등 3300만㎡(1000만평) 규모의 공단을 조성했더니 그린벨트 제약으로 부산이 싫다며 떠난 기업들이 50개 넘게 되돌아왔다”며 흐뭇해 했다. 이 밖에 해운대는 호텔, 백화점을 비롯해 관광객들을 유혹할 만한 볼거리와 먹거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면서 세계적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신공항 유치, 남강댐 물 끌어오기가 최대 현안

칭찬 일색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약선약술로 약간 술기운이 오른 얼굴의 허 시장이 “실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가덕도에 동남권 신공항을 유치하고, 남강댐 물을 식수로 끌어오는 두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려서다. “동남권 신공항 유치가 정부의 백지화 결정으로 늦춰졌죠. 하지만 부산은 김해공항을 가덕으로 이전하는 방향으로 추진 중입니다. 이제 이 문제는 정말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지방 공항 하나 더 만드는 정도로 접근하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는 것. “포화 상태에 이른 김해공항을 국가대계에 맞춰 확장해야 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공항을 만들려면 10㎞ 이상의 평지가 필요한데 내륙에서는 산이 많아 힘듭니다. 오사카, 나고야만 봐도 해안 쪽으로 공항이 들어서고 있지 않습니까. 지역끼리 갈등을 빚는 점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남강댐 물을 끌어오는 문제는 진주 등 경남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한발짝도 진전이 없다. 경남 의령 출생에 마산고까지 나왔지만 정작 경남도민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자책감도 적지않은 듯했다. “남강댐의 남는 물에 낙동강변 여과수를 개발해 보태면 창원 양산 함안 등 동부경남과 부산이 함께 1등급의 맑은 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물이 모자랄 때는 취수를 중단하겠다는데도 주민 안전에 작은 우려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무조건 반대하니….” 허 시장은 그럼에도 ‘부산-경남은 한뿌리’라는 모토를 내세워 경남주민들의 마음 얻기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부산시청 옆에서 목요일마다 경남농산물 직거래장터를 여는 것도 그 일환이다. “진주 등 경남지역 주민들의 걱정을 오롯이 이해합니다. 수년 걸려 음식 효소를 만들어내듯 시간을 갖고 정성을 다하면 진정성을 인정해줄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기업이 뛰어 일자리 만들도록 환경 조성 해줘야”

부산시가 지난 1일 잡 페스티벌을 개최한 터라 청년 일자리 부족 문제로 화제가 넘어갔다. 부산시 차원의 해법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가 어릴 때는 먹을 것도 없었지만 일자리 자체가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죠. 이젠 지역에 일자리가 있는데도 사람 구하기가 힘듭니다. 청년실업 문제의 핵심은 구인과 구직의 불일치 현상이라 봅니다. 부산은 고학력 청년층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반면 대기업이 적어 인재의 역외 유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소리없는 불도저?…떠벌이지 않고 할 일 하는 것"

허 시장은 부산의 청년실업률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수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를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해’로 정하고 청년들을 위해 ‘괜찮은 일자리 확충’에 온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청년층이 선호하는 좋은 일자리는 어차피 민간 부문 중심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청년들도 늘 긍정의 눈으로 미래를 보며 도전해야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민간 기업이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공단 만들기에 집중했다는 그는 “행정도 달려야 하지만 제 경험으로 볼 때 기업이 뛰어 일자리를 만들도록 지자체와 국가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은 되는 방향으로 일 추진해야”

계피차와 현미떡, 과일이 후식으로 나왔다. 약속했던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1978년 부산시에서 시작해 35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묵은 공무원’에게 공직철학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우리 직원들이 열심히, 착실하게, 창의적으로 일 잘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테고. 굳이 몇 가지 꼬집어 달라는 얘기죠?”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금방 밥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급변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강하고 친절한 조직이 돼야 합니다. 시민 불신을 없애기 위해 불굴의 열정이 필요하고 일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공무원은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공무원들의 순발력이 느려 기업들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가끔 법령·규정에 얽매어 ‘발이 늦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무엇보다 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는 긍정적인 접근 자세가 중요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업무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며 자신을 키워야 합니다.”

허 시장은 남은 임기 동안 어떤 일에 주력할까.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했다. “민선 5기 임기가 아직 1년8개월여 남아 있습니다. 역점적으로 추진한 부산의 10대 비전 사업을 하나씩 마무리하면서 일자리 창출과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지요. 그동안 애써온 도시의 외적 성장과 질적 성장, ‘세계 일류도시’의 큰 틀을 완성시켜 나갈 생각입니다.”

정림의 장독에서 수년간 숙성돼 깊은 맛을 내는 양념을 닮은 허 시장. 지금 크고 작은 문제가 적지 않지만 그가 책임지고 있는 부산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허남식 시장의 단골집 정림 민들레·질경이 곁들인 돌솥 오곡정식 대표 메뉴

부산 수안동에 있는 전통 한정식집. 동래시장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눈에 띄는 한옥 이층집이다.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는 메뉴는 돌솥 오곡정식. 민들레와 질경이 달맞이꽃 등 온갖 약초들이 먹음직스럽게 버무려져 밥상에 올라온다. 약초무침과 수수전, 채소전에다 모둠나물, 산야초 효소로 3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 장아찌는 음식인지 약인지 헷갈릴 정도다. 7년을 삭혀 만든 효소김치도 이 집의 명물.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등 양념 없이 10여 가지 야생초 효소로 5년 이상 숙성시키고 직접 담근 조선간장에 2년 담궈둔 이 김치는 씹을수록 시원한 맛이 난다.

약초로 삶아낸 돼지고기와 함께 입에 넣으면 상쾌한 뒷맛과 야생초의 은은한 향기가 조화를 이룬다. 돌솥밥, 생선, 구수한 토종 된장국과 함께 5가지 정도의 밑반찬을 간장종지 크기의 작은 놋그릇에 담아 낸다. 후식으로 계피차와 과일, 현미떡이 나온다. 가격은 1만6000원. 버섯탕수육도 인기 메뉴다. 다양한 종류의 버섯에 밀가루 옷을 입혀 튀겨낸 후 탕수소스에 버무렸다. 이 집에서 담근 약선약술과 함께 한잔 하면 그만이다. 가격은 2만5000원. 낮 1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얻기 힘들다. (051)552-1211

부산=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