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역사의 奸計, 10월 유신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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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였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는 내용의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이어 11월엔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져 90%가 넘는 지지로 유례없는 전면적 개발 독재가 막을 올렸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1호에서 5호까지 긴급조치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나중에는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조차 금지되었다. 노동운동은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고 1979년 부마사태와 더불어 박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시해되면서 유신은 막을 내렸다. 근대사의 어두움이요 비극적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유신은 급격한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단행되었다. 월남 패망이 가시화되었고 닉슨 독트린으로 한국의 안보가 구조적 불안으로 밀려들었다. 미국과 중국은 화해를 모색하는 중이었고 북한의 도발은 강도를 더해갔다. 1968년에는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무장공비가 청와대 인근까지 진출하는 사건이 터졌다. 당연히 국가안보 논리가 깃발을 올렸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경제개발이 나름의 성과를 낸 것도 유신의 원인으로 설명되어야 마땅하다. 경제개발로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민주주의 욕구가 분출했다. 그러나 동시에 독재 논리도 강화됐다.
경제성장률이 급속하게 악화된 것은 박 대통령 특유의 정면돌파 전략을 불렀다. 석유위기의 기운이 높아가고 세계가 급격한 경기후퇴의 길로 들어섰다. 1969년 무려 13.8%를 기록한 한국 경제성장률은 1972년 5.8%로 뒷걸음질쳤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해의 소위 8·3조치는 유신의 서막이었다. 초법적인 사채동결과 세제개혁 조치는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전체 기업의 45%가 부실 기업이라는 판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자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사실 이것이 유신의 본질이었다.
한국 경제를 1970년대 이후의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강압적인 자원배분이 필요했고 철권(鐵拳)이 요구되었다. 유신독재는 철강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전자 등 중화학공업을 추진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 어느 나라치고 중화학공업을 순탄하게 육성한 곳은 없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으로까지 치달아갔다. 그게 역사의 모순이요 복잡성이며 간지(奸智)였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경제적 성공과 원초적 폭력 혹은 야만적 독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문제는 이 대립 항쟁하는 두 가치가 아직도 현실정치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당사자들이 모두 역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항 대립은 변증적 화해로 나아가지 않겠는가.
유신은 급격한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단행되었다. 월남 패망이 가시화되었고 닉슨 독트린으로 한국의 안보가 구조적 불안으로 밀려들었다. 미국과 중국은 화해를 모색하는 중이었고 북한의 도발은 강도를 더해갔다. 1968년에는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무장공비가 청와대 인근까지 진출하는 사건이 터졌다. 당연히 국가안보 논리가 깃발을 올렸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경제개발이 나름의 성과를 낸 것도 유신의 원인으로 설명되어야 마땅하다. 경제개발로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민주주의 욕구가 분출했다. 그러나 동시에 독재 논리도 강화됐다.
경제성장률이 급속하게 악화된 것은 박 대통령 특유의 정면돌파 전략을 불렀다. 석유위기의 기운이 높아가고 세계가 급격한 경기후퇴의 길로 들어섰다. 1969년 무려 13.8%를 기록한 한국 경제성장률은 1972년 5.8%로 뒷걸음질쳤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해의 소위 8·3조치는 유신의 서막이었다. 초법적인 사채동결과 세제개혁 조치는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전체 기업의 45%가 부실 기업이라는 판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자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사실 이것이 유신의 본질이었다.
한국 경제를 1970년대 이후의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강압적인 자원배분이 필요했고 철권(鐵拳)이 요구되었다. 유신독재는 철강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전자 등 중화학공업을 추진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 어느 나라치고 중화학공업을 순탄하게 육성한 곳은 없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으로까지 치달아갔다. 그게 역사의 모순이요 복잡성이며 간지(奸智)였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경제적 성공과 원초적 폭력 혹은 야만적 독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문제는 이 대립 항쟁하는 두 가치가 아직도 현실정치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당사자들이 모두 역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항 대립은 변증적 화해로 나아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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